[2015년 11월 12일] 노동자일기 - by 가야

작성자
teacher
작성일
2016-05-18 10:46
조회
1404
오늘 김장이 끝났네요. 이제 두고두고 맛나게 먹을 일만 남았어요.
김장을 위해 준비할 게 여럿인데요, 
재료를 준비하는 것부터 칼이나 도마나 작은 절구를 모으는 일,
또 김치 묻을 독을 깨끗하게 닦는 것이 있어요.

누군가가... 창고와 자전거거치대 사이에 묻어놓은 고무통에 뭐가 많이 들어있다고 했지요.
뭐가 있을까 하고 열어봤더니 정말로 뭐가 많이 있었습니다.
몇몇 어린이들의 지극정성이 짐작되는, 우리 학교 어린이들의 자취들^^
어떻게 보면 어린이들에게 적절한 도덕교육은 무엇인가 고민할 수도 있는 흔적들!

그걸 보자마자
'결자해지. 니들이 해결해야지 나는 못하겠다.'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동시에 이런 사태를 일으킨 '결자'를 찾느니 이 상황과 무관한 '해자'를 모집하는 게 더 빠르겠다 싶었지요.
나의 든든한 우군, 2학년 어린이들도 함께 떠올랐고요.

전 아무런 속셈도 없이 정말로 아무 속셈을 품지 않고 2학년 교실에서 물었습니다.
"밖에 어마어마어마하게 힘든 일이 있고 이걸 하고 나면 아이구야 하는데 해볼 사람?"
그랬더니 저의 속셈을 의심할까 말까 고민중인 남자어린이는 맡은 청소를 그날따라 묵묵하게 하려고 준비중이고
몇몇의 아이들은 잠시 고민을 하였으며
누군가는 마주치는 눈을 얼른 피하였고
어떤 어린이는 청력에 문제가 있는 시늉을 하던 와중에
호기심 눈빛이 잽싸게 지나간 두 어린이가 손을 들었는데
그 반응에 무척이나 기뻐하고 환호하는 저의 모습에 두 어린이가 더 손을 들어서
그러니까 네 명의 어린이들이 "자발적으로" 그 힘든 일이란 것을 해보겠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은 저의 속셈이랄 게 없이 진행되었습니다.


첫날, 통 안의 내용물을 목격하고 일을 하던 한 어린이가 말합니다.
"세련된 옷을 입고 선생님이 노동자일을 시키네."
제가 세련된 옷을 입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참 고운 옷을 입은 본인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어떤 옷인지는 아래 사진을 보세요^^

둘째날, 전날 못한 일을 마저 하던 다른 어린이가 말합니다.
"선생님 이건 너무 힘들어요. 오늘 꼭 노동자일기를 쓸 거예요." 
그 말을 들은 친구들이 너도나도 쓰겠다고 하네요.

그래 한 번 써와라 했더니 다음날 써서 가져왔는데 
내용은 아이가 허락하지 않아 올리지 못하겠지만,
평소에 글을 쓸 기회가 있으면 예를 다 갖추어 미루곤 하던 그 아이가
일이 어찌나 고되었는지를 매우 강조한 내용으로다가,
본인이 그다지 관심 없는 맞춤법까지 다 맞추어가며, 
그림일기공책에다 큼직큼직한 정자체로 써 온 것입니다.
상식적인 눈으로 글을 읽어보니 '어린이노동착취의 배후'로는 제가 있는 게 분명했습니다! 

둘째날 지나던 소나기선생님이 아이들을 기꺼이 도와주셨는데 
그 멋지고 재미난 장면을 사진으로 담지 못했지만
그건 누가 보더라도 교사들이 어린이들의 노동력을 쥐어짜는 장면으로 오해할 여지가 있어서
차라리 사진을 못 찍은 게 낫군요.


아! 통 속에 들어가서 일을 하는 아이들을 보는데 왜 이렇게 웃음만 나올까요^^
정말 귀엽지 않나요!
노동자일기를 쓰겠다는 그 발상도 참 놀랍지 않나요.
1,2학년 몇몇 어린이들이 자기들도 거들겠다고 다녀갔는데 작업도구 및 공간의 한계로 네 명의 어린이만 했어요.
그리고 누군가 일하는 모습에 나도 함께 일한다고 다가오는 그 마음이 참 곱네요, 가을 마지막 단풍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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