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강‘자유와 생명의 공동체’ 수원칠보산자유학교는,우리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돌아보고,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을 고민해야겠다는 생각이 깊어져서 2008년부터 열린강좌 ‘아이와 강’을 꾸준히 열고있습니다. 아이는 자라고, 강은 흐릅니다. 아이와 강은 우리에게는 큰 화두와 같습니다. 아이와 강은 그 존재 자체로서 생명을 상징합니다. 아이는 언제나 순수하고, 강은 늘 생명을 품어 줍니다.  아이와 강은 한결같지만 또 얽매임 없는 자유입니다. 우리 모두 아이에서 출발하여 자라고, 흐르고 또 만나고 이어집니다. 우리는 생명과 자유, 자라고 만나고 이어지는 아이와 강에게 배웁니다

2021년 5월 28일 아이와 강 - 엄기호 선생님을 모시고

작성자
자갈자갈(3준영맘)
작성일
2021-06-04 15:08
조회
681
< 아이와 강 33회 - 삶을 위한 말귀, 문해력 >
강사 : 엄기호
일시 : 2021. 05. 28 (금) 늦은 8시

*사회자 소개 : 안녕하세요, 진행을 맡은 중등칠보산 자유학교 학부모 오세란입니다.
*아이와 강 소개 : 아이와 강은 2008년부터 꾸준히 진행해온 강좌로, 오늘이 33번째 강의입니다. 오늘은 칠보산 자유학교 학부모님 외에 여러 구성원이 모이셨습니다.
*강연 방식 : 엄기호 선생님이 말씀하셨듯이, 고민되는 지점을 말씀드리면, 선생님이 그것에 대해 강의로 풀어주시는 방식으로 진행하겠습니다. 중간에 채팅창으로 질문, 소감 등을 올려주셔도 됩니다.
*강사 소개 : 엄기호 선생님은 문화인류학자로서 소외된 사람들의 말을 전하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많이 고민하고 책을 써오셨습니다.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공부중독] [공부공부]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등의 책을 통해 사회에 질문을 던지고 계십니다.

● 강의 내용

- 엄기호 선생님이 교육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

제가 교육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 걱정하게 된 계기를 말씀드리자면 책에 썼듯이 제 초등학교 2학년 시절에 부정부패가 심한 담임 선생님을 만났는데, 노골적으로 뇌물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공부를 잘해서(웃음) 반장을 하게 되었는데 촌지를 못주니 부당한 누명도 씌우고 하다가 어머니가 학교 선생님들께 의논했더니 ‘전학가도 소문이 나고, 곤란할테니 그냥 눈 딱 감고 줘라’ 하셔서 담임 선생님께 국산 화장품을 줬는데 그게 쓰레기통에 버려진 것을 보게 되었지요. 엄청난 충격이었는데 그 후 어머니랑 일종의 공모 관계가 만들어졌지요. 내가 월등하게 공부를 잘하면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그냥 잘하는 정도가 아니라 엄청나게 공부를 잘하는 걸로. 전교 1등인 저와 전교 2등인 제 사이에 태평양만한 차이가 있는 정도로(웃음) 그러니 안건드리더라구요. 그동안 저는 학교와 교육에 대해 사이에 거의 증오감, 경멸감, 혐오감 같은 것들이 엄청나게 심했었지요. 학교공부를 그렇게 재밌어하진 않았지만 책읽는 것을 좋아했지요.
그러다 중학생이 되었는데 큰 누나가 대학생이 되어 학생운동을 하면서 제게 생일선물로 준 책이 [내가 두고 떠나온 아이들에게]라는 책으로 전교조의 전신인 전교협이란 곳에서 해직교사이신 분들이 학생들에게 쓰는 편지를 모아놓은 책이었지요. 이 책은 제 인생을 가장 바꿔놓은 책입니다. 중학교 때 읽고 펑펑 울었습니다. ‘아 이런 선생님도 있구나.’ ‘이런 교육이 가능하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지요. 공부 못한다고 일종의 학대를 당하지 않고, 모든 아이들을 평등하게... 이런 교육이 가능하겠구나 하는 생각에 나중에는 교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좀 했던 것 같아요. 그렇지만 대학교 가고나서 학생운동 하느라 바빠서 교직이수를 다 못했고, 나중에는 연구하는 것도 재밌어서 지도교수님인 조한혜정님의 조언으로 대학원을 가게 되었고요. 사실 저는 이런 기억 때문에 공교육에 대한 제 감정이 아주 양가적이에요. 공교육이 잘되어야 한다, 중요하다는 생각도 있고. 공교육이 잘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공부도 연구도 하는데 한편으로는 이게 정말 잘 될까? 이런 구조와 분위기 속에서.. 이런 암담함도 있습니다.

- 공부란 것이 뭘까?

그런 가운데에서 교육, 공부란 것이 뭘까?에 대한 고민이 이어져 온 것입니다.
첫 번째로 저는 공부 잘하는 친구들에게는 큰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고만고만한 친구들에게 관심이 많습니다. 공부라는 것이 가져다주는 특유의 기쁨이 있을텐데, 그 고만고만한 친구들도 그 기쁨을 좀 느끼고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지요. 그런데 이것도 참 양립이 안되지요. 공부를 못하면서 재미를 가지기도 힘들고, 재미를 느끼는 친구가 공부를 못하기도 힘들고요(웃음). 그 상태에서 우리는 공부를 아주 잘하기를 바라진 않더라도 공부의 재미를 느꼈으면 좋겠다 하는 바람이 있지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공부가 어떤 기쁨을 가져다주는가 하는 연구를 많이 했습니다. 그걸로 쓴 책이 [공부공부]라는 책인데요, 그 말씀을 먼저 드리겠습니다.

- 공부의 기쁨, 성장의 기쁨 : 생존역량, 적응력

그런 공부의 기쁨에 대해서 (원래 한학기 분량이지만) 아주 간단하게 10분에서 20분 정도로 말씀드릴게요. (*라고 하셨지만 40분 넘게 말씀하셨습니다^^)
공부의 기쁨은 존 듀이 등의 철학자가 얘기한 바로는 ‘성장의 기쁨’이라 할 수 있어요. 사람이 가장 기쁜 것 중에 하나가 내가 성장해간다는 느낌을 가질 때인데요, 이 성장은 지적인 성장, 육체의 성장(던지기, 달리기같은 역량의),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소통역량 등을 모두 포함한 것입니다. 이 성장의 기쁨의 핵심은 (수동적인 의미가 아니라 적극적인 의미로 해석해주시기를 바라며) 나의 생존역량이 증가하는 거거든요. 성장을 하기 때문에 이전에는 잘못 판단하거나 행동하거나, 두려움을 느꼈던 것에 대해 판단하거나 대처하는 능력이 생기고 있잖아요. 이것을 생존역량이라 합니다. 인간이 이성적이고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것 같지만 그 기반은 다른 동물과 비슷하게 생존역량이 생기는 것입니다. 학교 처음 들어갈 때의 두려움, 진급할 때의 두려움 같은 것을 누구나 느끼지요? 그런데 좀 적응이 되고나면 안심이 되잖습니까. 따라서 이 생존역량의 핵심을 ‘적응력’이라 할 수 있어요. 이런 점에서 저는 진보주의자라기보다 진화에 더 가까운 편이에요.

- 진보와 진화 : 진화론적인 의미로서 변화를 읽어내는 성장

진보와 진화의 다른 점을 살피면, 진보는 목적과 방향이 있다고 생각해서 그쪽을 열심히 쫓아가게 됩니다. 모든 진보주의자가 다 그렇지는 않지만 목적과 방향이 분명하면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가장 효율적인 것, 효율을 중심에 두고 사고할 수밖에 없게 되지요. 그것은 미리 생각해놓은 것을 가지고 뭔가를 잘라내는 행위라고 얘기합니다. 우리의 착각으로 진보주의가 뭔가를 추구한다고 하지만 (저도 진보적인 인간이지요, 좌파로 분류되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주의라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진보주의가 뭘 추구할지만 생각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뭘 잘라낼 것인가, 뭘 버릴것인가를 고민하게 되는 겁니다. 대표적으로 코로나가 한국 의료체계를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퍼진다면 의료계에서는 ‘산소마스크를 누구에게 씌울 것인가’하는 윤리적 압박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태리에서 이 윤리적 압박감 속에서 결국 공리주의적 선택을 하게 되죠. 최대 다수의 최대행복. 그 선택이 바로 80세 이상의 사람들에게 산소마스크를 안 씌우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에게 씌우는 것이지요. 이처럼 우리가 진보를 생각할 때 좋은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어떤 위기의 순간이 왔을 때 누구를 잘라내고 누구를 버릴 것인가에 대한 목표가 정해지는 순간이 불가피하게 벌어지는 일이라 볼 수 있죠. 이것은 공리주의, 능력주의와 결합이 되어 있습니다.
진화론적인 사고라면 진화는 목적이 없고, 방향이 정해져있지 않기 때문에 적응을 하며 자신의 생존역량을 키워나가는 것이라 생각하고, 그렇게 생각하면 항상 고민해야 하는 것은 ‘우리는 지금 어떤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는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가’ ‘우리를 둘러싼 환경의 변화는 어떠한가?’ 이 부분에 굉장히 민감해지게 되는데, 저는 이것이 아주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우리를 둘러싼 시대 변화, 환경. 이런 것들에 촉을 세우고 이 촉으로 변화의 양상을 읽어내고, 읽어낸 것에 맞추어 대처해 나가고. 그러며 사람은 성장해 나가게 됩니다.

- 과학교육의 중요성 : 외부로 시선을, 관찰과 기록-기다림-판단과 행동

이런 점 때문에 칠보산 자유학교에도 과거에 비해 더 많이 들어갔을 것이라 생각되는 것이 ‘과학’입니다. 왜냐하면 과학교육이 인간에게 가져다주는 가장 큰 축복이라 생각하는데, 그 역량이 바로 외부세계에 대해 관찰하는 역량을 키워주기 때문입니다. 인문사회학적으로 너무 사고하다보면 우리 내부에만 자꾸 신경쓰게 됩니다. ‘산다는 게 뭘까’ 등등. 그런데 자연과학은 자연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이지요. 외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관찰하고, 꼼꼼하게 기록하는 것 속에서 내가 판단을 내릴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데이터를 모을 줄 알고, 그동안 신중하게 기다릴 줄 알고. 이렇게 꼼꼼하게 관찰하고 기록하는 역량, 충분하게 만들어질 때까지 기다릴 줄 아는 역량, 신중하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역량. 이 세가지를 키우는 데 중요한 것이 과학교육이라 생각합니다. 자유학교에 노작 많이 하지요, 단도직입적으로 ‘양봉’을 아주 추천합니다. 몇몇 대안학교에서도 양봉을 하고있는데요. 또 농사를 이을거면 상추정도 보다는 ‘벼농사’는 해야된다고 얘기를 해요.

왜 양봉일까요?
참가자 대답: 머리가 좋고, 소득이 있고, 공동체, 사회생활, 환경 등등

우리는 지나치게 기후위기, 생태교육 등으로 바로 가버리는데 그것이 아이들 흥미와 호기심을 죽입니다. 너무 일찍 가버려서 답이 너무 빤해요. (죄송합니다 웃음)

- 생각하는 손

우리가 교육할 때 되게 주목해야 하는 게 손입니다. 리차드 새넷이라는 미국 유학자가 ‘생각하는 손’이라는 개념을 만들었어요. 사람의 생각은 머리가 아니라 손으로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교육을 통해 아이들을 성장시킨다 할 때에는 ‘뭔가를 다룰 줄 아는 손을 가진 사람’을 만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글 쓸 때 도구를 다루는 자기만의 손을 만드는 것, 이럴 때 손이 움직이면서 생각을 한다는 거 느껴보셨을 겁니다.

- 양봉에 대해서 1

양봉이 손이 되게 많이 가요. 자주 돌보고, 꼼꼼하게 생태를 관찰해야 하고, 꼼꼼하게 살펴보고, 잘 모를 때에는 나보다 뛰어난 사람에게 물어봐야 하고...
관찰하고 기록할 게 되게 많아요. 이걸 통해 ‘변화의 양상’을 캐치해야 합니다. 이 미묘한 변화에 둔감하여 쌓이고 쌓일 때까지 눈치채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이를 인문사회학에서는 차이같지 않은 차이를 차이로 인식하는 역량이라 합니다. 내가 그걸 차이로 인식할 수 있을 때 개입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만남과 관찰로만 이루어지고요. 아일랜드는 초록색을 지칭하는 단어가 아주 많고, 이누이트족은 다양한 눈을 구분하는 언어가 있듯이 다양한 차이를 인지하는 것이지요. 차이를 관찰하고, 차이의 의미를 캐치하고, 대처하고 이런 데에 양봉이 아주 좋습니다.

- 양봉에 대해서 2 : 반려와 애완

또 다른 이유는 애완이 되지 않으면서 상호호혜적인 도움이 되는 관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관계를 맺을 때 대부분 ‘반려’라는 이름으로 ‘애완’의 관계를 많이 맺습니다. 자식과 내가 애완의 관계가 될 때, 자식은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상태로 평생을 가게 됩니다.

(질문) 자녀가 부모님에게 ‘~~해서 고맙습니다. 커서 부모님 해외여행 시켜드리고 호강시키며 보답할게요’ 하면 뭐라 대답하시겠어요?

우리 어릴 때 부모님이 ‘나중에 어떻게 보답하려나~’하고 자녀가 ‘~~게 할거야~’ 대답하던 것이 나쁜 게 아닙니다. 부모가 자녀를 돌보고 있는 비대칭적 관계에서 나중에 빚을 갚을 수 있다고 얘기해주는 겁니다. 인간의 관계는 주고, 받고, 돌려줌이 순환되어야 관계가 지속됩니다. 그런데 줬는데 안받으면 깨지고, 줬는데 받고 돌려주지 못하면 그것도 깨집니다. 돌려주지 못한 사람이 빚쟁이(어원이 죄인)가 됩니다. 상호호혜적인 관계가 안만들어지죠.
요즘 자녀에게 갚을 생각하지 말고 너가 잘 살아라~ 하는 것은 영원한 빚쟁이로 만드는 것이지요. 애완의 관계가 될 경우 애완의 대상은 귀여워야하고, 귀엽다는 건 성장하면 안된다는 겁니다. 애완받는 사람은 끊임없이 사랑받기 위한 노력을 해야하죠. 그래서 사랑‘하는’ 주체가 되지 못합니다. 이게 한국 사회의 심각한 문제 중 하나입니다. 모두 사랑받을 노력만 하고있지 사랑하는 주체가 되려하지 않습니다. 사랑받기 위한 조건 중 하나가 애완의 관계에선 귀여워지는 것, 성장하지 않는 것이고요. 벌은 거리를 유지하며, 애완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상호유익성을 맺을 수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주고받고 돌려주는 지속성을 유지하는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애완의 관계가 되어 금방 질려버리지 않는가에 대한 해답을 줄 것입니다.

환경에 적응해가며 대처하는 역량,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지속시킬 줄 아는 역량(소통, 공감 등) 이 두가지 역량을 같이 가져가야하죠. 이 역량이 생겼을 때 내게 중요한 힘이 ‘다룸’의 힘입니다.

- 다룸의 힘

다룸의 힘이야말로 공부가 가져다주는 힘입니다. 이것이 나를 해방시켜 줍니다. 다루지 못할 때는 종속되어 있게 되죠. 자장면을 볶는다치면, 능수능란하게 요리할 수 있을 때 계속 실수가 있고 내가 종속되어 있음을 느끼지요. 이 때 능수능란하게, 자유롭게 다루게 되었을 때 내게 다루는 힘이 생겼다고 느낍니다. 공부가 가져다주는 힘이 바로 이런 자유지요. 자유는 내 맘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도구를 능수능란하게 다룰 줄 아는 힘입니다. 자연적인 법칙에 우리가 종속되어 있는데, 물리학의 법칙을 응용하고 다룰 줄 알게 되면 집도 짓고 배도 만들고 자동차도 만들 수 있게 되지요. 법칙을 알 때만이 그것을 다룰 수 있게 되고, 잘 다룰 수 있게 되면 나만이 작품을 만들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공부란 것은 법칙을 알고, 그 법칙을 다룰 줄 아는 역량을 키우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 해방감과 자유의 기쁨을 가지게 되지요.
아이들에게 ‘나중에 뭐가 되고싶어?’라는 질문보다는 아이가 ‘뭘 다루고 싶어하고, 더 잘 다루고 싶어하고, 어떤 도구를 다룰 때 기뻐하는지’를 관찰하고 그것에 대해 묻는 것이 더 좋겠습니다. 뭐가 되고싶냐는 질문은 성공에 대한 욕망과 연결되지요. 뭘 잘 다루고 싶은가에 대한 예를 들자면 조리학과 학생들에게 그렇게 물어보면 ‘불을 잘 다루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걸 잘 다루기 위해서는 ‘재료에 대해 공부해봐라, 산지 투어를 하며 산 공부도 해봐라.’ 같은 조언을 할 수 있습니다. 다룰 줄 아는 욕망이 생겼을 때 재료, 성질, 특성, 법칙 같은 것을 알고 싶어지게 되지요. 다룰 줄 알게 되면 더 잘 다루게 되고 싶어집니다. 이걸 알아가는 게 분별하는 역량이 커지는 겁니다. 이전에는 분별하지 못했던 걸 분별할 때 느껴지는 엄청난 쾌감이 있습니다.

- 분별하는 역량, 향유

몽골에서 밤하늘에 별을 볼 때 (비하하는 것은 아닙니다, 웃음)이를테면 문과 친구들이 “와!!!”하며 엄청 기뻐하지만 딱 5분입니다. 왜냐하면 할 수 있는 말이 “와 진짜 크다!”이런 말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를테면) 이과 친구 중에 별박사인 친구와 별을 볼 때는 6시간 동안 꼼짝없이 누워서 하늘만 봅니다. 분별이 되기 때문입니다. 한 시간동안 한마디도 안하다가 한 말이 ‘너무 대단하지 않냐, 저 수많은 별들이 저렇게 질서정연하게 움직인다는 것이’입니다. 분별할 줄 알게 되니 그 친구는 온 밤하늘의 별자리를 모두 훑어 설명할 수 있고, 별빛의 변화와 농사의 관계에 대해서도 설명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분별의 힘만큼 사람에게 크게 가져다주는 게 없습니다. 분별할 수 있을 때만 향유할 수 있습니다. 등산할 때도 그저 올라가기만 할 수 있는 빈곤한 등산과 온갖 나무와 풀을 향유하며 가는 것이 다르듯이.
제주도에 한 아이가 약초를 혼자 공부하여 구분할 수 있게 되었는데, 아이들 사이에서 명의가 됐다고 합니다. 그게 자신에게 큰 기쁨인거죠.
이렇게 공부의 기쁨을 다룸, 분별, 향유라고 얘기했는데 이걸 맛보고 나면 못벗어납니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맛보게 할 것이냐 하면 만나야 합니다. 내 손으로 만져봐야하고 내 손으로 기록해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전에 받았던 공교육이 교육을 망가뜨린 이유는 만남이 없이 종이로만 공부했기 때문입니다. 수영도 종이로 배웠지요. 만남이 없이 관찰하라, 기록해라, 다루어라 하면 생각하는 손은 만들어지지 않는거죠.

- 만남에 뒤따르는 위험

그런데 만남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위험’입니다. 만남에는 반드시 위험이 수반됩니다. 요즘에 위험한 놀이터도 만들어졌는데요, 일반적인 위험하지 않은 놀이터에서 놀게 되면 몸이 되게 둔해집니다. 그래서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게 첫 번째인데, 공교육에서는 위험을 감수하면 난리가 나는거죠. 그래서 위험을 감수하지 못하게 하다보니 선생님들도 아무것도 못하는 겁니다. 그런데 대안학교에서는 부모님, 교사들의 합의에서 위험을 어떻게 감수할 것인가, 위험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에 중점을 두고 하면 되는 것이거든요.

- 만남이 중단된 코로나 상황‘

두 번째는 코로나 상황입니다. 코로나가 모든 만남을 중단시켜 놨거든요. 실제로 진행을 보면서 관찰하고 기록하고 다루면서 분별력을 키우는 것이 모두 차단되어 있지요. 공교육에서는 더 심각하고요. 이런 문제들 때문에 절대 학생들이 뭔가를 다루면서 분별의 역량을 키우고 향유의 기쁨을 느끼기가 힘들어지는 상황이라 봅니다.


● 질문과 답

질문 1) 아까 벼농사는 왜 추천해주셨어요?
- 농사로 교육하시는 선생님들과 알게 됐는데, 토마토 상추같은 것은 빨리 자라는데다가 자라는 과정이 밋밋하다고 해야하나, 하지만 벼농사는 지루하긴 해도 자라는 과정이 다이나믹하고 알아야 할 것이 많다고 해요. 닌텐도 게임 중에 천수의 사쿠나히메라는 게임이 있는데 벼농사 게임이에요. 그 게임이 처음 나왔을 때 망할 줄 알았는데, 게임 출시 후에 일본의 농림수산부 페이지가 다운됐습니다. 너무 접속을 많이 해서. 이 게임이 아주 디테일해요. 벼농사를 위해서 너무 많은 지식이 필요해요. 그냥 키운다고 되는 일이 아니에요. 굉장히 꼼꼼하게 관찰하고, 벌레와 풀들의 특성, 날씨, 토질 등 알아가야 할 게 너무 많죠. 그걸 통해 분별하는 기쁨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벼농사가 가지는 풍부함이 있어서 추천합니다.

질문 2) 제가 요즘 걱정하는 것은 아이는 책을 많이 읽긴 하지만, 선생님이 말씀하신 외부의 자극에 대해서는 매우 두려움이 있습니다. 책에서의 안정감만 추구하는 것에 대한 걱정이 있습니다.
- 보통 책은 간접, 밖에서는 직접 체험으로 구분하는데 굳이 그렇게 구분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둘 다 직접 체험입니다. 내가 책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책을 읽어 다른 사람의 경험을 습득하는 게 아닙니다. 왜 읽기를 경험한다고 하냐면, 책읽기를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발견하기 때문에 이것을 ‘경험’이라고 합니다. 책을 통해 내용을 습득할 뿐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역량을 확인하게 됩니다. 독서모임을 하면 밑줄 그은 걸 교환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때 너는 왜 여기, 나는 왜 여기 그었는가? 그 이야기를 통해 ‘나에 대한 앎’에 이르게 됩니다. 책읽기를 통해서 드러나는 ‘내’가 있다는 거지요. 책읽기를 좋아하는 아이들은 이미 이것에 도달한 아이들이 많습니다. 나를 알아가는 것. 책읽기를 하며 지식을 쌓아가는 과정 속에서 나를 알아가는 것. 자기에 대한 앎으로 가는 경험이 되는가, 그냥 지식으로만 쌓는가를 유념하여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 강의를 궁금해 하시는데, 경험의 가장 큰 열매는 자기를 경험하게 되는 것인데, 그런 경험을 많이 주니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질문 3) 코로나 이후 홍천여고 사례가 아닌 다른 좋은 사례가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 다들 경험을 쌓는 중이기 때문에 좋고 나쁨을 구분하기에 데이터가 부족합니다. 자유학교도 그렇지만 뭐가 좋다 나쁘다가 아니라 뭔가를 계속 시도하며 시도를 통해 나오는 데이터를 모으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실험입니다. ‘어떻게 새로운 실험을 할 것인가?’ ‘어떻게 새로운 교육을 할 것인가?’에 대한 구상을 많이 하는 것이 더 중요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 예를 들어 한 대학에서 수업을 안하고 선생님이 하고싶은 이야기를 게시판에 올리면 학생들이 댓글을 달고, 댓글에 대해 선생님이 다시 댓글을 다는 식으로 수업을 했다고 해요. 이때 학생들의 성장이 긍정적이었다는 것. 얼굴을 대면하고 질문하라고 하면 안하는데, 댓글은 열심히 단다는 거! 그래서 그런 수업을 구안하신거죠. 자유학교도 아이들 특성에 맞게 ‘우리는 어떤 실험을 해볼까, (위축되지 마시고) 어떤 시도를 한번 해볼까’ 고민해봤으면 좋겠습니다.
- 제 경험을 예로 들자면 학생들 가르칠 때 다같이 같은 게임을 하고, 스스로 게임하는 것을 관찰하여 ‘나는 어떻게 게임하는지’를 기록하며 자기에 대한 앎에 도달하는 수업을 했습니다.

질문 4) 긴글 읽기가 사유의 역량을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잡한 것을 복잡하게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런 복잡한 생각을 하는데 도움이 될만한 책이 있으시면 추천 부탁 드립니다. 아카이빙에 대한 중요하다고 하셨는데 혹시 따로 방법이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 어떤 책이든 도움이 되지만 단, [밤새 알게되는 세계사, 간단하게 정리한 한국사, 5분만에 알려주마 양자역학] 이런 것들은 비추천합니다. *분만에 알려주는 게 가능한지 과학자에게 물어봤을 때 절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 그러나, 학생들의 속도는 되게 압축적입니다. 2시간동안 제 속도로 볼 수 없어요. 재미없는 장면들은 마구 넘기며 2시간짜리를 20분이면 다 봐요. 그렇게 하면 ‘이야기하는 역량’은 안생겨요. 줄거리만 생길 뿐. 우리가 재미없다고 생각하는 장면들이 작가들에게는 일종의 ‘쉬어가는 코너’죠. 우리 삶에도 그런 순간이 참 많지요. 다들 오늘 의미충만하게 사셨나요? 한 99프로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의미없다고 생각하는 것을 자꾸 스킵하고 지나가면 자꾸만 현실의 시간은 못견디게 되는거죠.
- 제가 만화 컨텐츠 학과에서 가르치다 보면 시대의 변화를 읽어낸다는 점에서, 우리는 차곡차곡 쌓아 성장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요즘 아이들은 그런 식이면 고구마 먹는다고 하고 망합니다. 요즘에는 애초에 등장할 때 만랩인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그게 트렌드인거죠. 거기에는 문제도 있는거죠. 너무 줄거리 요약적이라 경험이 안쌓이는 방식으로 가고있으니 그런 것만 피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어떤 책을 읽을 것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책을 읽은 다음에 어떻게 할 것인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야기를 나누냐에 따라 그 책을 읽은 경험은 굉장히 값지고 나의 성장에 도움이 될 수가 있는 것 같아요.

질문 5) 영상매체와 글자매체를 비교하는 대담 (Chapter 2) 부분에 영상매체가 더 익숙한 대담자가 포함되었다면 더 균형있는 풍성한 담론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그에 대한 이유가 있으신지 여쭙고 싶습니다.
- 이런 부분을 고민했는데 생각보다 영상에 익숙한 사람의 이야기 역량이라 하나, 그런 책을 잘 아는 사람을 찾고, 책으로 담아내기 어려운 딜레마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할 때에 풍성한 담론이 나올 것 같지 않았어요. 또 저희가 책을 쓸 때 책읽는 역량이 필요없는가? 그 역량도 계속 흘러가는가? 할 때 영상매체가 대세가 되는 과정에서도 책읽는 역량은 필요없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흘러간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 부분을 강조하자는 논의가 있었습니다.

질문 6) 애들이 재밌다고 하는 만화 저는 재미없고, 제가 재밌다는 만화는 애들은 안좋아하더군요.
- 요즘 아이들은 스토리 위주보다는 처음부터 깨가는 쾌감을 느끼는 것 같아요. (제가 구닥다리라서 그럴 수도 있지만-웃음-)그건 읽기의 재미가 아니라 보기의 재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읽는게 아니라 본다(구경한다)라고 할 수 있어요. 게임도 플레이보다 구경, 자동사냥을 즐기는 아이가 많아요. 그게 더 재밌다고 생각합니다. 압도적으로 시청각 매체가 등장하면서 벌어진 문제이기도 하고, 보는 것 중심으로 향유하는 쪽으로 가고 있어요. 이게 대세기는 한데 저도 좋은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도 삼국지 게임을 하고있는데 예전에는 수동으로 다 하느라 핸드폰 자판 한쪽만 닳았는데 지금은 자동으로 바뀌어서 틀어놓고 그냥 보고 있어요. 보는 재미가 있긴 한데 다루는 역량에 있어서는 다르지 않나란 생각이 들어요. 긍정적인 역량도 얘기해보자면, 평론하는 역량이 생기죠. 이 역량으로부터 전략을 짜고 기획하는 역량이 생기더라구요. 구경하면서 공부 엄청 많이 해요.

질문 7) 자기에 대한 앎을 벗어나 외부의 세계를 바라보고 싶은데 자꾸 내면의 생각에 머무는 게 가끔은 답답하게 느껴집니다. 관찰도 학습인가요?
- 그럼요, 관찰 자체가 학습입니다. 그리고 이건 심각한 문제입니다. 점점 갈수록 외부세계에 관심이 없어지고 자아만 비대해지고 있어요. 자아만 남고 세계가 사라지고 있다고 해요. 저는 대안교육의 방향이 이 부분에서 바뀌어야 한다고 몇 년 전부터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우리 어릴 때는 자아가 없다시피 컸지요. 그러다보니 대안교육 등에서 자아를 중요시하는 교육을 하게 되었죠. 그런데 실제로 학교교육은 안바꼈는데 사회전체가 자아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바뀌었어요. 자아를 강조하며 성공하는 자아가 될거란 것에 대한 강박이 아주 심해진 거예요. 자아자아자아! 이러다보니 세계에 대한 감각이 사라지다보니 바로 옆에 사람과 내가 어떻게 소통해야 할지, 세계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알지 못하고 달랑 자아만 남게 돼요. 그러다보니 자아의식은 되게 높은데 자존감은 되게 낮은 현상이 벌어지고 있어요. 조금만 지적해도 펑펑 울고 난리가 나요. 내가 소중한 존재로 다루어지지 않으면 못견딥니다. 그 반면, ‘그래도 괜찮아. 나는 그래도 존엄하고 소중한 존재야.’ 라고 생각하는 자존감은 바닥을 치는 양상입니다. 학생들에게 비평 지도를 너무 심하게 하지 말라는 대학도 있을 정도. 세계관, 세계에 대한 감각은 가르치지 않고 자아만 비대하게 만들어놓은 결과 자의식은 높고 자존감은 떨어지는 문제가 생겨났어요. 이 문제가 초중고대학교 전체를 관통하는, 실천적으로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걸 타계하기 위해 되게 안정적으로 가는거죠. 교육서비스 제공하듯이, 고객님께 서비스를 제공하듯이 가고있기 때문에 자의식은 더욱 강해지는 것 같습니다.

질문 8) 지금 부모자식 관계가 애완관계로 가는 부분에 대한 우려가 많다고 하셨는데, 왜 현시대에 그런 관계가 많이 형성되는지에 대한 연구내용도 있나요?
- 정신분석학 하시는 분이 쓴 책 <애완의 시대>가 있습니다. 저는 이 책의 반정도반 찬성하기는 하지만 이 관계에 있어서는 선구적인, 유일한 책입니다. 관심있으면 읽어보세요. 절반 정도는 아쉬움이 있었는데 저는 이 관계를 바꿀 수 있는 건 사랑의 관계라고 보는데, 그 부분까지는 가지 않아서 아쉬움이 있었어요.

질문 9) 요즘 스마트폰을 자주 보다보니 저도 일상에서 긴 글 읽는게 어려워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정보를 전달해야 할 일이 있을때는 자유롭게 길게 쓰고 있는 것 같아요(설명충? ) 주변에서 종종 짧게 줄여달라, 말로 해달라, 웹포스터로 만들어달라는 요구를 받곤 해요. 제가 정보를 얻는 입장과 전달해야하는 입장이 다른데, 글 말고는 다른 방식(이미지화, 동영상)을 만드는 재주는 없는데 어떻게 소통해야할지 고민이에요.
- 인터넷에 글 쓸 때는 제한이 없으므로 쓰는 사람은 구조화하여 쓰지 않게 됩니다. 칼럼을 쓸 때는 분량이 정해져 있으므로 뭘 빼고 넣을지 매우 고민하게 되는데, 인터넷에서 글을 읽는 사람은 글 쓰는 사람이 그리 썼다는 걸 알기 때문에 다 읽을 필요가 없고 필요한 것만 읽으면 됩니다. 이것은 지식을(또는 이야기를) 정보화해서 보는 데에 우리가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정보를 엮어서 이야기를 만드는 것인데, 그렇게 할 줄 알아야 이야기하는 역량이 생기는 거예요. 그런데 읽을 때 정보만 빼먹는 게 아니라 이야기를 통째로 읽으며 정보를 받아들여야 분별하는 역량도 생기고 동시에 정보를 담아낼 이야기를 만들어낼 역량이 생기는거죠. 그런데 인터넷 글쓰기의 가장 큰 문제는 이야기를 담아내는 방식으로 글쓰기를 안하는 거예요. 말하는 방식으로 글을 쓸 뿐. 그러다보니 지루하고 재미없기 때문에 정보만 쏙쏙 빼먹게 되죠. 학생들을 보면 정보를 찾고 받아들이는 역량은 되게 탁월한데 이야기의 경험은 없어요. 이게 제일 큰 문제입니다. 인터넷 글을 뽑아보면 문단이 없고 문장들만 나열되어 있어요. 문장들이 묶여 한 덩어리의 문제의식을 종결짓는 것이 문단이고, 문단이 모여 하나의 절을 만들게 되는데 이것이 구분 지어지지 않는 거예요. 이 연습이 되어있지 않아요. 학생의 인터넷 글을 문단으로 묶어봤더니 그제야, 이것이 문단으로 엮일 수 있는 글쓰기가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게 웹소설과 종이소설의 차이이기도 해요. 재미요소가 다르더라고요. 대세는 인터넷글이겠지요. 그런데 그 중에서도 놓치지 않아야 하는 것이 ‘구조화하는 역량’이라고 생각합니다. 아까 그 학생에게 쓴 글을 문단으로 묶어보라고 했더니 글을 못였고 있어요. 못엮어낸다는 것을 학생이 알게 되었기 때문에 나쁜 일은 아니죠. 그 후 지도를 하며 학생은 하고싶은 얘기를 본인이 모르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해요. 하고싶은 이야기를 찾고나서 비약적으로 발전한 학생도 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것이 처음이며, ‘이것을 얼마나 구조화하여 이야기할 수 있는가?’가 두 번째 장벽입니다. 그걸 넘어서는 게 중요한거죠.


질문 10) 지금 여기에 있는 많은 부모들이 우리말을 살려쓰고 영어공부에 몰두했던 세대라 이 전 세대에게는 한자를 모르고 어떻게 깊이 있는 배움이 이뤄질 수 있는가? 걱정을 들었던 세대입니다. 저희 또한 영상세대의 아이들을 보면서 깊이 있게 읽고 쓰지 못하는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세대가 지날 수 록 우린 깊이있는 배움이 빈약해 지는 중일까요? 배움이 달라진 것일까요? (선생님이 말씀하신 향유라는 낱말을 이해하는데 저스스로 시간이 필요했거든요. 요즘 잘 쓰는 말...ㅋㅋ) 글쓰기의 중요성- 구조화는 충분히 공감되는데 우리가 쓰는 언어를 더 풍성하게 되찾아야하는 것은 아닌지 궁금합니다.
- 뭔가를 배우고 배움을 구축해가는 방식에 있어서 제 생각은, 인지하는 방식에 큰 변화가 온 것은 틀림없습니다. 읽는다는 것은 시간을 들여 종합하는 능력이 있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에요. 종합하는 능력이 있을 때에만 읽기는 가능해집니다. 읽을 때에는 그동안 읽었던 것이 쭈욱 따라와서 나중에 하나로 뭉쳐지게 되는 것이죠. 이게 읽는 방식의 특징이죠. (웹소설은 그렇지 않다.)
- 그런데 지금은 비쥬얼라이데이션이라고 해서 이 읽는 방식이 시각적 방식으로 바뀌었습니다. ‘보기’ ‘구경’ 미국에서 가장 큰 트렌드가 비쥬얼라이제이션이에요. ‘이걸 어떻게 시각화할 것인가’의 문제가 되는거죠. 이것은 지식을 구성해가는 획기적인 방식입니다. 이것은 직관적이에요. 예를 들어 고속도로에서 방향별 색깔선이 생긴 것은 획기적인 변화로, 직관적으로 인식할 수가 있어요. 요즘 배움이 인식되는 방식이 직관적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고속도로에서 방향별 색깔선이 생긴 것은 획기적인 변화로, 그 전에 어떤 방향인지를 읽었어야 한다면 지금은 직관적으로 바뀌었습니다. 요즘 배움이 인식되는 방식이 직관적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실제 칸트의 미학 같은 것을 보면 직관과 가장 결합된 것이 상상력이거든요. 이 부분에서 확실히 우리는 구닥다리입니다. 이것이 깊이있다 없다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각각 다른 깊이에 대한 탐구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며, 두가지를 비교하기는 힘들지 않나 싶습니다.
- 그런데 하나 더, 직관적으로 표현하는 사람도 읽기가 있어야 하고, 언어에 대한 역량이 있어야 합니다. 저는 이 점 때문에 읽기와 쓰기는 여전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다수 대중에게 이제 앎은 상당히 비쥬얼라이징입니다. 이모티콘을 사용할 때 더 내 감정을 더 잘 표현하는 것도 하나의 비쥬얼라이제이션입니다. 이전의 시각화, 시청각 교재는 그냥 보기좋게 만드는 차원이라면, 이제는 아예 지식 자체가 비쥬얼라이제이션으로 구축되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저도 그 영역이 아니라 저한테 물어보시면 해드릴 말씀이 없습니다.(웃음) 학생들 꼬셔서 이모티콘 좀 만들어보면 어떨까 상상해봤습니다. 아무튼 배움이 달라진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 그리고 언어를 더 풍성하게 써야한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모든 분별할 수 있는 것에 이름을 붙이는데 그것이 언어입니다. 그 단어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어가 존재함으로써 만들어내는 체계가 있거든요. 그 체계를 우리가 언어라고 얘기합니다. 누군가 ‘우리가 언어를 배우는 것은 사물에 대한 해상도를 높여가는 과정이다.’ 라는 표현을 했습니다. 우리는 아직 완전히 시각화될 수 없는데, 인지 과정이 시각화되는 과정에서 문제는 해상도가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선명도만 높아지게 됩니다. 즉, 감정의 강도만 높아지게 되는 것이죠. 예를 들어 ‘맛있다’라고 하면 ‘어떻게 맛있다는 것인지(달콤쌉싸름하다 등)’는 없고 ‘진짜 맛있다.’ 같은 표현만 가능합니다. 그 때문에 접두사가 발달하게 되죠. (과장형의 언어, 진짜 캐맛있다. 등) 이 과정에서 세밀하게 분별하는 언어가 생겨나지 않는 것이 걱정이죠. 학자들은 ‘과잉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뭔가 과잉되면 경계가 사라진다는 거예요. 우리는 이전에 경계가 있기 때문에 경계를 부숴버리려고 했어요.(탈주에 대한 욕망) 그런데 지금은 그게 과잉에 대한 욕망으로 바뀌어버렸다는 건거죠. 이럴 때 결핍을 메꾸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과잉을 축적하는 것에서 기쁨을 느끼게 돼요. (나한테 부족한 걸 채우기보다 계속 쌓아놓으려는 분들 계시죠?) 요즘 사람들은 자기의 의사를 소통하는 게 아니라 자기의 감정을 과장한다고 얘기해요. 이것은 소통이 아니라 할 수 있죠. 저는 과잉의 문제가 중요하다고 보는 편이에요 그래서 더 강조하는 게 관찰입니다. 관찰을 해야 분별에 대한 욕망이 생기고, 분별을 해야 과장과 과잉이 아니라 결핍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설명할 용어가 내게 없구나.)

질문 11) 분별하고 향유하고 자신을 만나고 성장하기 위해 만나서 책에 대해 얘기하기 전에 먼저.... 책을 읽어야 하는데 책 읽는 힘을 키우는, 책을 읽는 몸을 만드는 괜찮은 방법이 있을까요?
- 책을 읽는 몸을 만들려면 지루함을 견디는 몸, 집중하는 몸이 있어야 해요. 요즘 아이들에게는 주변에 재밌는 일, 자극하는 일도 많은데 딱 하나만 붙들고 있기가 힘든 건거죠. 그래서 저는 벼농사, 양봉같은 길게 해야만 하는 작업을 강조해봐요. 그것이 어렸을 때부터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구닥다리같은 소린데요, 하..... 정말 집중력이 없습니다. 정말 지루한 걸 못견딥니다. 10분만에 학생들이 판단하거든요. ‘재미없다, 재미있다.’ 그만큼 시간이 짧아졌다는 건 문제라고 생각해요. 소설이든 영화든 길게 못하고 있는. 그러니 진득한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한데, 아주 어렸을 때부터 경험하고 같이 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모든 거에 집중하고 모든 거에 견딜 수는 없잖아요. 아이가 어떤 거에 집중하는지, 어떤 거에 지루함을 잘 견뎌내는지를 발견하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문제는 아이에게 그런 게 발견되면 너무 반가워해요. 그래서 애를 속성으로 하게 너무 많은 걸 줘버려요. 별에 관심있다고 그 다음날 천체망원경 사줘버리는. 중간 단계를 다 생략해버려요. 존 듀이가 말한 ‘지적역량’이란 것은 A와 B가 있으면 이 두 개를 연관짓는 역량이라고 하거든요. 과거에는 연관이 없다고 생각하던 것을 연관지을 수 있을 때 지적역량이 생겼다고 이야기해요. 뭔가를 연관짓게 되면 그 다음부터 재밌는 건 이 중간조건을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물이 100도에서 끓는다. 왜 100도지? 이렇게 쪼개가는 겁니다. 이렇게 쪼개고나면 또 쪼개면서 알게되고 또 쪼개면서 알게되는 거죠. 그런데 이 중간다리를 놔줘야 하는데, 자꾸만 아이에게 중간과정을 없애버리는거죠. 이렇게 되어버리니 중간과정을 발견하는 게 아니라 더 빨리 가고 싶어져버리고, 더 멀리있는 걸 알고 싶어져 버리는 겁니다. 제 주변에는 그 단계에서 딱 필요한 정도만 사주라고 합니다. 더 사줬다가 나중되면 꼭 나오는 말이 ‘이것까지 사줬는데 지금와서 안한다는거냐’ ‘너는 참을성이 없고 금방 질려한다’ 하는데, 제가 보기엔 자기가 질리게 만들어놓고 참을성이 없다고 하니... (웃음) 요즘 매체가 참을성 없게 하는 면도 있지만, 중간과정을 발견하게 돕지 못하는 것도 있죠. 애들 관심은 애들 관심 정도로 생각하면 되죠. 나도 내가 뭘 하고싶어하는지 잘 모르는데, 애들이 어떻게 알겠어요. 결론보다 결론으로 가는 과정이 재밌어야 하는거죠. 과학자랑 대담하면서 ‘어떻게 하면 과정이 재밌다는 걸 알려줄 수 있을까? 과정의 재미를 알게하는데 좋은 게 과학만한 게 없다’ 해요.

- 어렸을 때 더 많이 해야하는게 (인문사회쪽보다) 예체능이랑 자연과학 공부라고 생각해요. 이게 어느정도 된 다음에 몸에 대해, 자유에 대해 철학적 사유도 할 수 있고 기록하는 과정에서 인문사회학적인 역량도 나오는데, 그 바탕이 되는 것이 예체능과 자연과학 공부인 것 같습니다. 자유학교에서도, 아까 말한대로 기후위기, 생태 하는 식으로 바로 점핑하는 경향이 있는데 바로 가는 결론이 중요한 게 아니라 과정을 꼼꼼하게 다루는 게 중요한 겁니다. 자연과학에서는 실험을 하고 딱 그만큼의 결과가 나오는거죠. 그런 부분을 강화하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