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강‘자유와 생명의 공동체’ 수원칠보산자유학교는,우리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돌아보고,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을 고민해야겠다는 생각이 깊어져서 2008년부터 열린강좌 ‘아이와 강’을 꾸준히 열고있습니다. 아이는 자라고, 강은 흐릅니다. 아이와 강은 우리에게는 큰 화두와 같습니다. 아이와 강은 그 존재 자체로서 생명을 상징합니다. 아이는 언제나 순수하고, 강은 늘 생명을 품어 줍니다.  아이와 강은 한결같지만 또 얽매임 없는 자유입니다. 우리 모두 아이에서 출발하여 자라고, 흐르고 또 만나고 이어집니다. 우리는 생명과 자유, 자라고 만나고 이어지는 아이와 강에게 배웁니다

2016년11월25일 아이와강 "세상을 움직이는 불변의 진리" - 오종우 교수님을 모시고

작성자
가야
작성일
2016-12-14 19:50
조회
711
세상을 움직이는 불변의 진리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가 말하다






· 장 소: 수원칠보산자유학교 둥지층

· 시 간: 2016년 11월 25일 금요일 오후 7시 30분-9시 20분

· 강연자: 오종우 교수님 (성균관대학교 러시아어문학과 교수)

· 기 록: 최원배 (배움분과 ‧ 3학년 최요엘 부/중등 대표교사)




• 작은 공연(오카리나): 양인서, 양지원, 여민지



오늘은 톨스토이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만약, 밖으로 나가



“나는 왜 살지?”

“내가 태어난 이유는 뭘까?”



이런 질문을 한다면, 친한 친구는



“먹고 살기도 힘든데 그런 얘기가 왜 나와?”



그럴 것입니다. 아니면, 집에서



“나는 왜 살까?”, “왜 태어났을까?”



이런 이야기를 한다면, 가족들이



“우울증 걸렸나?”



이런 생각을 할 것 같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오늘은 『안나 까레리나』 이야기를 먼저 하겠습니다. 거기서 레빈이 이런 말을 합니다.



<자료 2쪽>

생명이 어디에서 태어나고 무엇 때문에 주어졌으며 무슨 이유로 존재하고 원래 무엇이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별 생각 없이 그것을 누리는 사람들이 두려워졌다.



“왜 살지?”



이런 생각을 안 하면서 삶을 누리는 사람이 무섭다고 톨스토이는 말합니다. 요즘 유난히 흉악범죄가 많이 일어납니다. 만약, 그들이 “삶의 가치가 뭘까?”, “왜 살지?” 이런 생각을 했다면 흉악범죄가 많이 줄어들었을 것입니다. 위의 말은 톨스토이가 마치 이 시대를 예언하는 듯합니다.



주위를 떠올리며 생각해봅시다. 현대인들은 얼마나 생각하며 살까요? 그런데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현대인들의 생각이라는 것이 혹시 계산은 아닐까요?



생각은 “thinking”이지만 계산은 “calculation”입니다.



thinking / calculation



현대문명의 기반에는 컴퓨터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계산기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대인들은 왜 사는가에 대해 물어야 합니다. 현대인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우리를 포함해 “바쁘다.”라는 말일 것입니다. 생각을 하기 힘든 이유는 바쁘기 때문이 아닐까요?



<자료 4쪽>

“…저들은 거리에서 어떤 할머니가 털리는 걸 보면 지극히 몸을 사리는 바로 그들이에요. 한데 어째서 운전석에 앉으면 두려움을 모르게 되는 걸까요?”



밀란 쿤데라의 『느림』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자기가 살기 바쁘면 주위 사람이 고통을 당해도 아랑곳 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이는 생각하지 않는 삶에 대한 성찰을 보여줍니다.



톨스토이는 평생 좋은 삶이란 무엇인지, 어떤 삶이 가치가 있을지를 고민했습니다. 이 고민이 얼마나 치열했냐면, 그는 거의 매일 일기를 썼었는데, 권당 600-700페이지가 되는 그분의 전집이 90여권에 이릅니다. 한 면에 30여 줄이 되는 빽빽한 분량이에요. 이 글들의 주요 내용이 어떤 삶이 좋은 삶인가에 관한 것입니다.



토스토이는 40대 중반에 『안나 카레리나』를 썼습니다. 그 전에 썼던 것이 『전쟁과 평화』였지요.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세상을 움직이는 불멸의 힘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안나 카레리나』를 썼을 때, 드디어 그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톨스토이는 그가 발견한 진리를 이 작품을 통해 쓴 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들을 위하여 교훈서나 민담서들을 쓰는 것으로 전환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안나 카레리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잠깐 톨스토이의 사진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진감상>



톨스토이가 아주 어렸을 때, 그의 부모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는 못 생겼다는 컴플렉스 때문에 40을 시작하며 수염을 깎지 않았습니다. (사진을 보며) 항상 이렇게 좁은 책상에서 집필했습니다. 눈매는 예리하고 날카롭지요. 이 사진은 톨스토이 집으로 가는 길입니다. 자작나무가 울창하게 있는 길이지요. 제가 직접 찍었습니다. 톨스토이가 평생 살았던 집이에요. 2층에 집필실이 있었고, 1층은 응접실로 사용되었습니다. 뒤편에 이렇게 톨스토이 무덤이 있습니다. 그 무덤을 직접 보면 깜짝 놀라게 되는데, 아무런 비석도 장식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냥 1미터 70정도 되는 면적에 조금 솟아오르게 보이는 토지가 전부입니다. 너무 허전해서 제가 장미를 올려놓고 사진을 찍어 봤습니다.



뒤편 농촌 마을입니다. 톨스토이는 기성교육에 대한 반발이 심했었는데, 이곳에서 20대 후반-30대 초반까지 생활을 했었고, 대안학교를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농민들과 함께 생활했습니다. 톨스토이는 교과서도 직접 집필했어요. 삶에 대한 진실을 찾기 위해 순례자와 같은 삶을 살았지요. 그의 집에서 모스크바까지 약 200Km가 넘는데, 그 거리를 항상 걸어 다녔습니다.



<자료 7쪽>

행복한 가정은 서로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기 다르게 불행하다.



전 세계 어디나 가정을 이루는 조건은 비슷합니다. 부모 간 사랑과 신뢰가 있어야 하고, 살림도 너무 궁핍하지 않아야 합니다. 주위 사람들과 정신적 관계의 유대가 형성되어야 하고, 아이들도 잘 자라야 합니다. 행복한 가정이 되기 위한 조건, 즉 이 모든 것이 충족되어야 한다는 조건은 거의 비슷합니다. 그러나 불행한 가정이 되는 조건은 제 각기 다릅니다. 위에 열거한 조건 중 하나라도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불행한 가정이 됩니다. 부부간에 사랑은 있지만 아이의 건강이 안 좋으면 행복한 가정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안나 카레리나』는 이러한 언급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핵심은 가정이 아니라 행복과 불행입니다.



언제 행복할까요?

사람은 언제 행복감을 느낄까요?



사람은 충족하거나 만족하고 있을 때 행복감을 느낍니다. 이는 경제적, 정신적 결핍이 없을 때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항상 결핍을 느끼지요. 무언가가 차고 넘치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돈이 넘치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러면 더 불행해집니다. 사람이 행복감을 느끼는 것은 참 힘듭니다.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조건이 행복감을 주지는 않습니다. 같은 것을 주어도 사람마다 느끼는 것이 다르지요. 여기에는 복잡한 문제가 얽혀있습니다. 어떤 것이 진짜 행복일까요?



『안나 카레리나』, 그 스토리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이 책은 안나가 젊은 청년 장교와 바람난 이야기입니다. 안나는 정숙한 부인으로 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녀의 오빠가 바람을 피우다가 들키게 됩니다. 오빠의 아내는 같이 못살겠다고 하지요. 오빠는 여동생인 안나에게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급하게 전보를 칩니다.



“내가 실수를 해서 들켰다. 아내가 너를 신뢰하니, 네가 와서 내 아내를 달래다오.”



안나는 그 전보를 받고 기차에 오릅니다. 그 길에서 청년 장교를 만나게 되는데, 그가 안나를 보고 매료됩니다. 안나에게 생명감이 느껴졌던 것이죠. 그래도 안나는 정숙한 부인이라 자제하려고 애쓰지만 청년장교는 적극적입니다.



안나는 오빠 집에 도착해 그 가정의 문제를 잘 해결해줍니다. 돌아가기 전, 안나는 시간이 좀 남아서 사교모임에 들르게 되는데, 거기서 청년장교를 다시 만납니다. 그런데 그를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오빠 아내의 여동생인 키티였습니다. 키티는 청년장교를 결혼상대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키티는 안나와 청년장교의 춤추는 모습을 보고, 그 관계를 알아채게 됩니다. 그녀는 좌절을 하지요. 안나 역시 은연중에 청년장교에게 마음이 가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키티는 마음에 상처를 입게 되는데, 그가 자기보다 안나를 좋아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키티의 가족들은 그녀를 가까운 온천마을에 휴양을 보내 줍니다. 키티는 그곳에서 정신적으로 성숙하게 되지요. 키티는 나중에 레빈의 아내가 되어 큰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 내용이 다음 자료에 실려있습니다.



<자료 7쪽 2번>

설사 악한 사람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적어도 거짓말이나 위선자는 되지 않겠어. 나는 더 이상 위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지내겠어.



이상한 말입니다. 나는 악당이 될지언정 위선자는 되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는 ‘선과 악’ 대(vs) ‘위선’의 문제로 인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과 악이란 무엇일까요?

대단히 거창한 것 같지만, 사실 한자의 의미에서도 찾을 수 있듯이 좋을 선, 악할 악입니다. 영어로 ‘good’과 ‘bad’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대단히 상대적인 가치일 수 있습니다. 나에게 좋은 것은 선이고 나쁜 것은 악이라는 의미도 될 수 있으니까요. IS테러가 심한데, 이 또한 선과 악의 개념에 따르면 상대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위선은? 좋은 것일까요, 나쁜 것일까요?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요?

좋은 것이 드러납니다. 좋은 것은 선이지요. 우리는 ‘위선’, 그러면 거부감을 심하게 느끼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선입니다.



사실 아래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도 위선입니다.



‘어떤 좋은 일을 하면서 칭찬받아야겠다!’

‘이것을 하면서 기분이 좋아져야지!’

‘남에게 평가를 잘 받아서 나중에 무언가를 해봐야지!’



아무런 이유 없이 행하는 것이 선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위선은 우리 주위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톨스토이는 거짓을 너무 싫어했습니다. 심지어 너무 솔직한 자기 이야기를 일기에 기록을 했습니다. 우리는 선과 악을 대립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톨스토이에게는 ‘선악’과 ‘위선’이 대립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키티의 깨달음은 큰 것입니다. 악하게 보일지라도 솔직한 것을 보여주겠다고 깨달은 키티의 깨달음 말이지요. 이것은 이 책의 주제와 관련이 있는 ‘자연스러움’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나누어드린 참고자료 7쪽 3번에 나와있는데, 잠시 후에 다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윤리나 도덕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으세요?

윤리하면? (대답: 의무)

맞아요, 우린 윤리하면 금기가 먼저 떠오릅니다. 조금 불편한 생각이 들지요. 당위가 떠오릅니다. 그래서 윤리는 행복하다기 보다는 인간의 자격과 연관 지어 생각하게 됩니다. 따라서 윤리는 행복과 거리가 먼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요.



그러나 아닙니다.

간단히 예를 들어보지요. 요즘은 돈이 장땡인 시대입니다. 부정할 수 없습니다. 돈이 최고이기 때문에, 도둑질을 하거나 사기를 쳐서 자기 주머니의 돈을 늘립니다. 그러면 집에 가서 그 사람이, 잠자리에 들 때 행복할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도둑놈이라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돈이 장땡인 시대입니다. 길거리를 가다가 자기도 돈이 없지만, 주린 아이에게 한 끼라도 먹여준다면, 그날 저녁에 그 사람은 행복할 것입니다. 사람이란 존재는 이런 것이지요. 그 조건은 무엇이 좋은지, 나쁜지에 대해 가치 판단을 한다는 것입니다. 좋은 일을 하면 남들이 뭐라 하건 손해를 봐도 기분이 좋습니다. 심지어 악당, 살인자, 도둑놈도 이 사실을 다 압니다. 이것이 사람이란 묘한 존재의 모습입니다. 당장 손해 보는 것처럼 보여도 윤리적으로 벗어나지 않는 삶은 살면 행복합니다. 윤리는 행복한 것입니다. 윤리는 내 마음으로부터 발동하는 것이지요. 왜냐고요? 우리는 모두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윤리와 자연은 굉장히 가깝습니다. 이런 이유로 톨스토이는 자연에 대해서 많이 생각을 했습니다.



<자료7쪽 3번>

풀베기는 한 두둑 한 두둑 진행됐다. 긴 두둑도 짧은 두둑도 있었으며, 풀이 좋은 두둑도 나쁜 두둑도 있었다. 레빈은 시간이 흐르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여 이른 시각인지 늦은 시각인지도 느끼지 못했다. 풀베기를 하면서 그는 커다란 기쁨을 안겨 준 변화를 체험했다. 풀을 한참 베다 보면 자기가 하는 일을 잊어버리는 순간이 찾아든다. 그러면 일이 쉬워진다. 그때는 그의 두둑도 다른 농부의 두둑처럼 반반하고 훌륭하게 베어졌다. 그러나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의식하고 더 잘하려고 애쓰면 갑자기 풀베기가 힘들어지고 두둑도 엉망으로 깎였다.



좋은 삶의 조건은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톨스토이는 거짓된 것에 대한 혐오가 아주 컸습니다. ‘거짓된 선생’, ‘위선’, 이런 모습들이 삶을 오히려 해친다고 생각했습니다.



레빈이 1800페이지나 되는 긴 소설에서 계속 고민한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절대적 선은 없을까?’에 대한 것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깨달음이 안 왔지요. 그러다 생활 속에서 문득 그 깨달음이 오게 됩니다.



<자료 8쪽>

농부 표도로는 여인숙 주인 키릴 로프가 자기 뱃속을 살찌우기 위해 살고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분명히 이치에 들어맞는 말이다. 우리는 모두 이성을 지닌 존재이므로 자기 뱃속을 살찌게 하는 것 말고 다른 생활 방식을 택할 수 없다. 그런데도 느닷없이 그와 똑같은 사람인 표도르라는 녀석이 자기 뱃속을 살찌게 하기 위해서 사는 것은 좋지 않다. 진리를 위해, 신을 위해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자. 나는 단지 작은 암시를 받았을 뿐인데도 곧 그것을 이해했다. 아니 나나, 몇 세기 전에 살았던 수백만의 사람들이나, 그 문제에 간해 자기의 모호한 말로 생각하고 쓰고 하던 현인들이나,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두,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고 좋은 삶이란 무엇인지 알고 있다.



신.

여기서의 신은 특정 종교에서 말하는 신의 의미가 아니라 ‘절대 불편의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변하지 않는 진리말이지요.



깨달았습니다. 무엇을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생각해보니, 옛날 사람이나 요즘 사람이나 미래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나 부유한 사람이나,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절대적인 삶의 의미 말이죠. 진리는 상당히 단순하고 명쾌해야 합니다. 이해하기 힘든 것을 진리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복잡한 것,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어린아이까지도 순간 모두가 알고 있어야 진짜 진리입니다.



톨스토이의 마지막 일기 1월 1일차 첫 줄이 ‘세상에 있는 것은 단순하다.’입니다. 82세에 세상을 떠나기 전 이미 큰 깨달음을 얻었던 것입니다. 그는 1910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어느 학자는 4년 후 일어난 세계 제1차 대전의 원인이 톨스토이가 사망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누구나 사람이라면 다 아는 것이 있다.’는 것을 톨스토이는 깨닫습니다.



사실 저도 알고 있었습니다.

절대적 선.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학생들도.

그것.



아시죠, 그것?



요즘 찬바람이 많이 붑니다. 그러면 콧물이 좀 나지요. 그것이 당연한데, 그것이 감기인줄 알고 병원에 매일 데리고 다녔습니다. 그러면 안 되는데 말이죠. 시행착오였습니다. 코를 풉니다. 자기 코이지만 더럽지요. 그러면 버립니다. 이것이 솔직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질문 하나. 길거리라도 바로 버리는 것이 맞을까요? 잠깐 주머니에 넣었다가 쓰레기통에 넣는 것이 맞을까요?



자기 뱃속 살찌는 것이 맞는 것이긴 합니다. 하지만 누구나 다 압니다. 도둑놈도 살인자도 알고 있습니다. 잠깐 가지고 있다가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이 옳다는 것을 말이죠. 약자가 쓰러져있습니다. 밟고 지나가는 것이 옳습니까? 남을 험담하고 뒤에서 공격하는 것, 자기는 놀면서 남의 노동으로 먹고 사는 것, 이것이 옳습니까? 톨스토이는 이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간단한 생활의 이치라고요? 아닙니다.

세상이 돌아가는 커다란 이치와 같은 것입니다.



정치 이야기를 해봅시다. 국회의원 당선자가 처음 말과 다르게 행동하는 것. 이것은 사기꾼과 다를 바 없습니다. 경제를 보지요. 기업체가 골목에서 떡볶이 장사를 위해 가게를 내는 것. 이것이 할 짓인가요? 이윤추구가 기업의 정신이라고 해서 그러면 안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도둑질과 같은 것입니다. 커다란 일도 사소한 진리와 같습니다. 이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소설 마지막.



<자료 9쪽>

나는 아무것도 새로이 발견하지 않았다. 다만 나 자신이 알고 있던 것을 분명하게 인식했을 따름이다. 나는 단순히 지나가 버린 과거뿐 아니라 지금 당장도 나 자신에게 생명을 부여해주고 있는 그 힘을 이해한 것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사람은 그러한 사실을 모두 알고 있는데, 우리의 삶은 왜 좋지 않을까요? 『전쟁과 평화』에서 톨스토이의 이와 같은 고민은 여기까지였습니다. 그리고 『안나 카레리나』에서 이것을 풀게 됩니다.



안나는 왜 청년장교에게 매료되었을까요?



그녀의 남편은 위선적이었습니다. 그 삶이 너무 위선적이었지요. 이에 반해 안나는 솔직하고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마치 톨스토이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남편이 너무 위선적이어서 자기 삶을 살기도 어려웠던 것입니다.



<자료 9쪽 5번>

남편이 관람석으로 이동하면서, 아첨하여 인사하는 사람들한테는 일부러 정중하게 답례하고, 같은 관등의 동료들과는 친절하지만 때론 건성으로 인사를 나누고, 권력자들을 만나면 그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애쓰면서 귀 끝을 누르는 커다랗고 둥근 모자를 벗어 대는 모습을 안나는 바라보았다. 그녀는 남편의 이런 태도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혐오감을 느꼈다.



청년장교는 솔직했습니다. 그래서 안나는 그 청년과 관계를 맺게 됩니다. 끝내는 둘이 유럽으로 도망을 가게 됩니다. 안나의 남편은 처음에 이혼을 거부했다가 나중에 이혼하기로 합니다. 이탈리아에 간 두 사람은 러시아에서 망명한 화가를 만나게 됩니다. 마침 거기에는 <그리스도와 빌라도>라는 그림이 있었습니다.



<자료 9쪽 5번>

“그리스도의 표정이 정말 놀라워요!” 안나가 말했다. “빌라도를 가여워하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어요.” 아닌 게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연민의 표정이 없어서는 안 되었다. 왜냐하면 그의 표정에는 사랑, 천상의 평화, 죽음에 대한 각오, 그리고 말의 공허함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 담겨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한쪽은 관능적인 생활의 화신이고 다른 한쪽은 정신적인 생활의 화신이기 때문에, 빌라도에게는 관료의 표정이 있고 그리스도에게는 연민의 표정이 있는 것은 당연했다.



이 대목에 나오는 그림을 볼까요?



<그림>





이 작품은 엄청나게 커다랗습니다. 빌라도는 선량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한 가지 질문 드리겠습니다. 빌라도는 빛을 어떻게 하고 있지요? 이 그림의 제목은 <진리가 무엇이오>입니다. 사실 빌라도는 빛을 향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예수는 빛을 안 받고 있습니다. 빛을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성서의 이야기를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러시아는 그리스도정교 문화권이라 자연스럽습니다. 성서의 스토리를 보면, 빌라도는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인데, 사람들이 예수를 데려와 죽여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예수가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들의 감정 때문에 그런 요구를 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군중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자신의 총독관직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임을 인지합니다. 그는 자신의 관직을 유지하기 위해 예수를 죽여야 했습니다. 성서에 나오듯이 예수를 죽인 것은 빌라도였습니다. 예수는 신의 아들입니다. 신의 아들을 죽인 것은 악마, 즉 사탄이 아닙니다.



위선입니다.



빌라도는 자신의 실리를 위해서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를 배반했습니다. 이 내용이 이 그림에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가 빛을 향하고 있지만 등지고 있는 것처럼 그린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진리입니다.



<자료 9쪽 5번>

제목 : 흡혈귀와 자이언트.



흡혈귀와 자이언트.

이 둘이 극명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입니다. 진실을 대면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더 생각해볼 것이 있는데, 『전쟁과 평화』입니다.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리나』 전에 『전쟁과 평화』를 썼습니다. 이 책은 밥 먹고 자는 시간 외에 모든 시간을 투자하여 읽으면 딱 일주일 걸립니다. 저는 학문을 하겠다는 제자가 있으면 이 훈련을 꼭 시킵니다. 사람이 인간으로서 체험할 수 있는 귀중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인간 삶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이 긴 작품의 마지막에 톨스토이는 이렇게 씁니다.



<자료 10쪽>

순간 가까이 있던 어느 프랑스 병사가 단단한 막대기로 머리를 힘껏 내려친 것 같았다. 좀 아팠다. 그러나 무척 불쾌했다. 왜냐하면 이 고통이 그의 주의를 흩어버려 보고 있던 것을 못 보게 방해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인가? 내가 쓰러지고 있나? 다리에 힘이 빠진다.’ 그는 이렇게 생각하고 반듯하게 쓰러졌다. 그는 포병들과 프랑스 군의 싸움이 어떻게 되었는지 보고 싶어서, 그리고 또 발간 머리의 포병이 당했는지 아닌지, 포를 빼앗겼는지 아닌지 그것들을 알고 싶어서, 눈을 떴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늘을 제외하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맑지는 않지만 그래도 한없이 드높고, 회색 구름이 조용히 흐르는 하늘이었다. ‘정말 고요하고, 평온하고, 장엄하구나. 내가 뛰어다닐 때하고는 전혀 다르다.’ 하고 안드레이 공작은 생각했다. ‘우리들이 뛰어다니고 소리치고 싸우고 있던 때하고는 전혀 다르다. 그 프랑스 병사와 포병이 악이 받치고 공포에 질린 얼굴로 꽂을대를 서로 잡아당기던 때하고는 전혀 다르다. 구름이 흘러가는 이 끝없이 드높은 하늘은 전혀 다르다. 이전에 나는 왜 이 높은 하늘을 보지 못 했을까? 이제라도 알게 되었으니 난 참으로 행복하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바대로 세상을 느낍니다. 이는 천동설이 맞는 것입니다. 어머니께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착한 일을 하면 어머니가, ‘내일은 해가 서쪽에게 뜨겠네.’ 하십니다. 죄송하지만 틀린 말이지요. 동쪽에서 뜨는 것도 틀린 말입니다. 지동설이 진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느끼는 것은 천동설입니다. 내가 지각하지 못 하지만, 나의 한계를 인정하고 더 큰 진리를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쟁과 평화』에서 전쟁은 전투가 아닙니다. 이는 내가 맞는다고 주장하는 삶, 곧 전쟁과 같은 삶을 말합니다. 반면에 자기 부족함을 인정하고 평화롭게 사는 삶, 이는 곧 평화를 의미합니다.



빌라도는 자기가 아는 진리를 실리를 위해 배반했습니다. 신을 파괴했고, 불변의 진리를 파괴했습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사탄이 신을 죽이지 못합니다. 위선이 죽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통하여 진리를 탐구합니다.



<자료 11쪽 6번>

지금 레빈은 러시아의 농업이 부진한 원인에 대한 새로운 장을 쓰고 있다. 러시아의 빈곤은 토지 소유권의 부적절한 분배와 잘못된 방향에 그 원인이 있을 뿐만 아니라, 최근 비정상적으로 러시아에 유입된 외국 문명, 특히 도시로의 집중을 초래하고 사치 풍조를 조장하며 그 결과 농촌에 피해를 입히는 철도, 신용 대부, 투기 등에 의해서도 발생한다고 썼다. …



레빈이 쓴 책의 한 구절입니다. 『안나 카레리나』는 이 책도 들어가 있어서 더 깁니다. 자기 체험을 글로 정리하는 것. 좋은 글은 이렇게 나옵니다. 내용이 상당히 구체적입니다. 좋은 글은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진짜 체험을 이렇게 쓰는 것입니다.



톨스토이는 은행에 대해서도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은행에 돈을 맡겼더니 노동도 하지 않았는데 돈이 불어났습니다. 그는 이것마저 이상하게 생각했던 강직한 인물이었습니다.



사람의 몸은 유기체입니다.

심장 참 중요하지요. 그러나 심장이 더 커지고 비대해지면 좋을까요? 아닙니다.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새끼손가락도 마찬가지입니다. 각각의 기관들은 각각 그 조직체 내에서 의미가 다 있습니다. ‘이것’이 중요하니 ‘이것’을 크게 키우면 비정상이 됩니다. 작은 것이라고 무시하면 안 되고, 중요하다고 해서 커지면 안 됩니다. 인류역사를 보면 이런 일들이 벌어졌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유럽사의 중세를 볼까요? 종교가 비대해졌었지요. 지난 20세기는 이념, 이데올로기. 지금은 경제, 자연과학이 비대해져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다 소용없는 것인가요? 이 시대에 돈이 너무 강조되었거나 자연과학이 강조되었다고 해서 이것을 무시하는 것 또한 옳지 못 합니다. 우리 삶에서는 경제, 정치, 문화, 사상, 이념 모두 중요합니다. 모든 가치는 나름대로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비대해진 것이 나머지를 다 지배해버리게 됩니다. 운동선수에게 중요한 것은 스포츠맨십입니다. 그러나 지금은요? “그 선수 얼마짜리야?” 이런 말을 먼저 하지요? 지나치게 비대해진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인류역사의 흐름입니다. 비대해진 것이 한 없이 가지는 않습니다. 비대해 지는 가치, 그 전에 존재하던 가치가 너무 억눌려있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과거를 한 번 생각해보죠. 실질적 쓸모가 없어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삐삐. 기억하시죠? 당시에는 이것이 얼마나 유용했던 물건이었습니까? 그러나 쓸모가 없어지면 사라지게 됩니다.



경쟁 역시 중요한 개념입니다. 모든 가치가 지배가치가 되면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그 가치에 대해서 질문을 안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류는 이것을 끊임없이 극복해나갑니다. 이것이 인류의 역사가 보여주는 끊임없는 흐름입니다.



<자료 12쪽>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복수하리라.” - 에피그래프



에피그래프는 묘비명입니다. 한 인물의 일생을 집약해서 이야기해주는 것이지요.



위 말은 『안나 카레리나』의 에피그라프입니다.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 여기서 나는 신이다!



세상을 운용하는 변하지 않은 진리가 있습니다. 안나는 바람을 피우다가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 복수는 주인공, 즉 안나의 소멸과 연결된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안나는 이야기의 마지막에 유난하게 히스테릭해지는 모습을 보입니다.



<자료 12쪽>

안나는 자기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 순간 안나의 절망적인 질투는 미친 듯한 격정적인 애정으로 변했다. 안나는 그를 와락 끌어안고 머리며 목덜미며 손에 마구 키스를 퍼부었다.



안나는 다가오는 두 번째 차량의 바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바퀴와 바퀴의 중간 부분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 안나는 빨간 손가방을 내던지고 두 어깨 사이로 고개를 숙이고 열차 밑에 손을 짚으며 뛰어들었다. 그리고 마치 일어날 준비를 하듯 가벼운 동작으로 무릎을 꿇었다. 그 순간 안나는 자기가 한 짓에 몸서리쳤다. ‘나는 어디에 있는 걸까? 무슨 짓을 한 거지? 도대체 왜?’ 안나는 몸을 일으켜 뒤로 물러나려고 했다. 하지만 뭔가 거대한 것이 사정없이 안나의 머리를 꽝 하고 떠받고 등을 할퀴며 질질 끌고 갔다. ‘하나님, 저를 용서해 주소서!’ 안나는 저항이 헛된 일임을 깨닫고 중얼거렸다.



결국 안나는 기차에 몸을 던져 삶을 마감합니다. 그리고 소멸하지요. 안나는 세상을 움직이는 불멸의 진리를 거슬렀던 것입니다. 안나가 히스테릭했다가 기차에 몸을 던진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안나는 끝까지 이렇게 주장합니다. “너무나 위선적인 남편과 사교계! 나는 솔직하게 살 거야! 사랑도 솔직하게 할 거야! 나는 솔직한 삶을 택했어!”



이것이 안나를 상상해서 그린 그림입니다.



<그림>





기차역으로 가는 안나의 표정이에요. 세상을 우습다고 바라보는 듯한 안나의 표정이 보이세요? 그러나 안나는 암만 그렇게 주장해도 자기가, 자신이 낳은 아이를 두고, 결혼도 깨고 청년장교와 불륜을 저지르는 것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소설 마지막에 그렇게 히스테릭해지는 것입니다. 마치 빌라도처럼 암만 자신을 합리화해도 변명하고 핑계를 대도, 그 내부에서는 인간이기 때문에 ‘그래도 이건 아니지…’라는 생각이 깔려있던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운용하는 불변의 진리와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 시국이 너무 안타까워서라도 오늘 톨스토이를 가지고 왔는데요, 세상의 모든 사람은 절대 선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지키지는 못할지라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지요.



서두에 했던 코 푼 이야기 기억하시지요? 안나는 너무 솔직해서 그 휴지를 바로 버린 것이었습니다. 솔직은 했지만 좋은 삶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압니다. 실리를 떠나도 우리는 모두 다 알고 있습니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자신이 어기는 한이 있어도 이런 일이 벌어지면 어이없어 합니다. ‘어이없다’는 말은 ‘어처구니 없다’의 준말입니다. 어처구니는 지나치게 비대해진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지나치게 무언가가 커지면 우리는 어이없어 하게 됩니다.



톨스토이가 쓴 민담 중에 『사람에게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는 톨스토이가 발견한 진리를 대중이 더 잘 이해하기 바라는 마음에서 썼다라는 것은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바훔이라는 농부가 있었습니다. 소작농이었지요. 어느날 그의 처제가 놀러와서 언니에게 묻습니다. “언니 시골생활 불편하지 않아? 도시로 와.” 언니가 대답합니다. “번잡해. 시골생활이 좋아”. 바훔이 이 이야기를 듣고 말합니다. “이 땅이 내 땅이고 더 넓으면 좋을 텐데.” 때마침 악마가 바훔의 이야기를 듣게 되지요. 그러고는 땅주인이 바뀝니다. 소작인들이 돈을 모아 작은 땅을 사게 됩니다. 농사가 잘 되어 땅을 더 넓히지요. 그리고 더 넓힙니다. 이때 도사와 같은 어떤 사람이 바훔에게 말합니다. “여기서 더 멀지만 비옥하고 좋은 땅이 있어요. 하루에 1000루블만 내면 되는데, 거기서는 해 뜨는 데부터 해 지는 데까지 선을 그으면 자기 땅이 됩니다.” 이야기를 들은 바훔은 그곳을 찾아가게 되고, 다음날 계약대로 자기 땅을 긋기 시작합니다. 열심히 뛰어가며 선을 긋지요. 정오가 되었습니다. 이제 돌아가야 출발점으로 갈 수 있습니다. 바훔은 ‘5분만 더…’라고 생각합니다. 그 후에도 ‘5분만 더…’라는 미련을 놓지 못 합니다. 이제 10여분 더 갔습니다.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오전에 너무 열심히 뛰어서 돌아가는 것이 힘이 듭니다. 아침에 출발했던 것에 거의 다 오긴 했는데, 해가 지고 있습니다. 출발점을 보니 언덕 위입니다. 바훔은 언덕 위는 해가 조금 더 늦게 진다고 생각하고 있는 힘을 다해 뜁니다. 바훔은 마침내 도착에 성공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루 종일 죽을힘을 다했던 바훔은 그 자리에서 죽습니다. 같이 왔던 동료가 2미터도 채 안 되는 땅을 파고 바훔을 묻어주지요.



여기서 악마는 누구일까요? 바로 바훔의 마음입니다. 자기가 과잉되면 행복할 것 같지만 더 불행해지게 됩니다. 행복은 욕망과 관련 있습니다. 커지면 커질수록 더 불행해지지요. 빌라도와 안나를 보면 알 수 있지요. 그러나 변하지 않는 불멸의 진리가 있지요. 이 얘기를 하기 전에 그림을 하나 보겠습니다.



<그림>

제목: 유토피아

16세기. 풍속화. 자기만 과잉되어 있는 상태.



<그림>

제목: 이카루스의 신화





이카루스의 날개는 밀랍으로 붙어있습니다. 이카루스는 자기 욕망을 절제하지 못 하고 태양 가까이 날아올라 추락하고 말지요. 여기가 이카루스가 빠진 곳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주위 사람 모두 추락한 이카루스에 대해 아무 신경 쓰지 않고 있습니다. 자신이 과잉이 되어서 커지는 것, 이것은 의미 없습니다. 더구나 빌라도처럼 자신의 실리를 위해 과잉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요. 불멸의 진리는 그때 작용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이없어하지요. 좋은 지위에 있으며 자신의 실익을 위해 자기 배만 채우면, 우리는 말도 안 되는 짓을 한다고 합니다. 이런 현상이 사람들에게 일어납니다. 이것이 불멸의 진리인 것입니다. 무언가 과잉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접한 사람들이 어이없어 하는 것. 이것이 세상을 지키는 불멸의 진리입니다. 이 진리는 세상에서 과잉된 것을 억제 시킵니다. 이것이 세상의 진리입니다.



무엇이 인간입니까?

도스토옙스키도 이 주제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우리는 솔직해서 코 푼 휴지를 버립니다. 이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 유지될 수 있는 이유는 밤에 버린 휴지들을 주워서 다시 버린 사람들 때문입니다. 남이 버린 휴지를 주워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 때문에 세상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톨스토이보다 한 발 더 나간 것이 도스토옙스키입니다.



이것이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얽히게 됩니다. 저의 졸저 『예술수업』이라는 책에서도 언급을 했었는데, 이 수업에서 저는 음악을 들으며 악보를 보게 합니다. 음악을 들으며 악보를 보면 묘한 상상력이 생깁니다. 음악을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짧은 음악이니 끝까지 들어보죠.



<음악>

비발디, 세상의 참 평화 없어라



비발디의 <세상에 참 평화 없어라>라는 곡입니다.



‘세상에 고통 없는 참 평안 없어라.’ 역설입니다. 열정. 우린 열정을 열심히 하는 것이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열정은 고난입니다. PASSION. 이 단어는 고난을 뜻하기도 합니다. 같은 단어인데, 상반되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고난을 당하기 때문에 우리는 성숙할 수 있습니다. 힘들어하고 어이없어하는 친구들에게, 우리의 고난과 고통은 축복입니다. 고난 때문에 성숙할 수 있습니다. 삶의 가치를 맛 볼 수 있습니다. 매일 낄낄거리고 살면 천박해질 수밖에 없지요. 괴테는 ‘눈물 젖은 빵을 먹지 않은 사람은 인생을 논할 수 없다.’ 라고 말했습니다.



안나는 혼자 잘났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소멸될 수밖에 없는 역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불멸의 진리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좀 전에 봤던 악보의 아무리 작은 음표 하나라도 자기 마음대로 나가는 것은 없습니다. 이것이 세상을 유지하는 불멸의 진리인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전면에 나서지 않아도 그러한 상황에 이르면 어이없어 합니다. 이 힘이 세상을 유지합니다. 이것이 톨스토이가 발견한 진리이지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사진인데요, 마지막 사진을 보겠습니다.



<사진>

톨스토이와 손녀





<자료 14쪽>

도스토옙스키는 여러 작품에서 2×2=4가 인생을 지배하지 못한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그렇다고 2×2=5처럼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도 인생인 것은 아니라고 했다. 도스토옙스키에게 산다는 것은 이득을 챙기기 위해 계산서를 작성하거나 장부를 마음대로 쓰는 것과 전혀 다른, 하나의 예술작품을 만드는 일과 같았다. 그래서 『죄와 벌』을 썼다.

-『무엇이 인간인가』 프롤로그



지금은 정보가 더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 정보는 전달되지 않습니다. 왜? 없어서 그렇습니다. 생각해봅시다. 인류역사에서 위대한 선연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톨스토이, 공자, 예수, 마호메트 등 말이죠. 삶의 지표가 되는 많은 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감히 없을 수가 있을까요? 그 좋은 말들이 이렇게 많은데…. 없다니요?



그 좋은 말들이 실천이 되었다면 우리 인류는 이미 천사가 되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말도 자기의 내부에서 다시 탄생합니다. 그 말이 나를 압박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를 지배하는 가치가 되면, 우리는 그 가치의 노예가 됩니다. 질문을 안 하게 됩니다. 암만 좋은 것도 자기 내부로부터 다시 탄생해야만 진짜 의미를 가질 수 있고 실현될 수 있는 것입니다.



창조적 영감을 위해 과학자들을 가끔 만납니다. 그 만남의 처음에 하는 말이 있습니다.

“2×2=4가 맞습니까?”

이것을 ‘맞다.’라고 하고, 연구를 시작하면 반드시 의미 있는 연구가 될 것입니다. 모든 좋은 말들은 자기로부터 다시 탄생해야 합니다.



이야기의 시작을 ‘생각하는가?’로 했습니다. 아래 글을 읽으며 마무리하겠습니다.



<자료 13쪽>

마음의 인상들을 계산하여 받아들이고, 열렬하기는커녕 그저 뜨뜻미지근한 정도로만 사랑하며, 정확하긴 하되 나이에 비해 너무도 논리적인 그렇기 때문에 값싼 그런 청년이라면, 단언컨대 틀림없이 나의 청년에게 일어난 일을 피할 수 있을 테지만, 어떤 경우에는 비록 비이성적으로 보일지라도 크나큰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열광에 몰두하는 것이 아예 그러지 않은 것보다 훨씬 더 높이 살만하다. 청년 시절에는 특히 더 그러한데, 왜냐하면 일관되게 논리적이어서 핑계나 대는 그런 청년은 희망이 별로 없으며, 그건 싸구려 인생이기 때문이다.

-도스토옙스키





■느낀 점 나누기



1. 이혜인(중등2)·이용민(초등4) 아버님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데, 그런데 왜 그렇게 못 사는 사람이 많을까?’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솔직함과 의무를 말씀하셨는데, 그 말이 마음에 많이 와 닿았습니다. 위선이 어쩌면 착하게 살려는 평범한 사람들의 노력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 남현희(졸업)·남강희(졸업) 아버님

선생님 말씀 들으며 마음이 정리되었습니다. ‘모든 고전들은 결국에 다 일치하지 않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허클베리 핀이 생각났습니다. 선생님의 책 『예술수업』에서 사느냐 죽느냐를 멋지게 표현해주십니다. 시국이 이러니 마음이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3. 김종일(졸업) 어머님

이 학교를 졸업했다는 것이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저는 『죄와 벌』을 들어서 끝까지 읽은 적이 없었습니다. 깊이가 너무 깊어서 무슨 말인지 몰랐던 적이 많았습니다. 다시 러시아 문학을 접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너무 어려웠습니다. 음악도 더 느끼고 싶었는데 잘 안 되었지만 확실히 느낀 한 가지는, 나는 위선자라는 것입니다. 위선이라는 말이 굉장히 싫은 말인데, 오늘은 반갑게 다가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