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학기 전체여행
작성자
가야
작성일
2017-05-21 09:08
조회
1890
여행 마지막 날이다. 아침 다섯 시 반, 두 아이가 숙소 현관에서 서성인다. 오늘 일찍 일어나면 집에 일찍 갈 수 있어서 이른 시각에 눈떴다고 한다. 모둠마다 도착시각은 엇비슷한데, 아이들이 그렇다고 믿으면 그런 거다. 막상 일어나니 할 게 없어서 심심하단다. 그럼 동네 한 바퀴 돌자고 했다.
고요한 아침, 마을 뒷산으로 이어진 작은 숲길로 발을 옮긴다. 실안개가 낀 길 위로 참개구리가 폴짝폴짝 뛰어다니고 쇠백로가 무논에서 먹이를 잡는다. (참개구리나 쇠백로, 이런 이름은 모두 우리 학교 아이들이 알려주었다.) 숲길 왼쪽으로는 작은 개울이 소리를 내며 흐른다. 머리 위 높게 자란 나무들 사이로 하얀 하늘이 흘끗 보인다. 두 아이가 주고받는 이야기가 고요한 아침에 활기를 더한다.
“이번 여행 시시하고 재미없어요.”
한 아이가 내뱉고 다른 아이가 맞장구친다. 내가 알기로 두 아이는 포근한 집과 정다운 식구들을 무척 사랑한다. 집밖으로 나가는 일을 썩 좋아하지 않고 학교 여행을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무겁다 하였다. 만약 교사들이 거친 활동을 제안했다면 눈물을 펑펑 쏟으며 실랑이를 아주 오래했을 테다. 그래서 아이들의 말이 의외다. 여느 해보다 쾌적한 숙소에서 머물렀고, 좋아하는 친구들과 어울릴 기회가 많았고, 자유시간이 넉넉했는데 말이다.
숙소에서 즐겁게 놀았던 두 아이 얼굴을 여러 번 목격했다. 여행이 왜 시시하고 재미없을까 하고 아이의 말을 따라 중얼거리니 아이가 이렇게 말한다.
“여행이 별로 안 힘들어요.”
학교에서 여행을 다녀온 이후 아이가 여행을 싫어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드물게 듣지만, 난 그 말을 안 믿는다. 언제나 여행을 힘들어하는 아이가 있지만 특정한 과거에 갇혀 있는 아이는 한 명도 없었다. 아이들은 모두 자라기 마련이고 자기 경험을 소화시키는 능력도 함께 키워간다.
이번 여행이 별로 안 힘들어서 시시하고 재미없다는 아이의 말을 들으니 내심 뿌듯했다. 아무리 여리고 약한 아이더라도 도전거리와 모험적 요소가 있는 여행을 저절로 꿈꾸고, 자기가 알고 있는 나를 뛰어넘으려는 열망을 은연중에 품는다. 교사의 강권이나 학교의 공식 활동이라는 바깥 힘에 기대기도 하지만 결국 제힘으로 앞길을 헤치며 거듭나는 게 아이들이다!
통곡의 밤을 아직도 기억한다. 집에 두고 온 엄마가 보고 싶다며 엉엉 울었던 아이들이 속출하였던 여행의 밤들을. 어르기도 달래기도 다그치기도 하다가 우리가 서로 이렇게 힘들게 하면서까지 여행을 해야 하는 건가 한숨 쉬던 순간이 있었다. 그때 울음소리의 주인공이었던 아이들이 어느덧 자라서 동생들을 이끌고 교사들을 거든다. 말로 몸으로 마음으로 교사들에게 가르침이 된다. 역시나 사람은 점점 나아지고 나이 들어도 배움의 기회는 수없이 찾아온다!
개구리 소리를 들으니 귀가 맑아진다
여행 첫날, 아이들과 마을을 둘러보다가 마을 주민들이 함께 가꾸는 거대한 연못을 찾았다. 우리 모둠에는 곤충, 조류, 파충류 등 각종 동물을 잘 아는 박사님이 있다. (그런 아이들은 다른 모둠에도 있고 학년마다 있다!) 혼자라면 스쳤을 것들을 박사님 덕에 다시 들여다본다. 박사님에게 미안하지만 아무리 알려줘도 뭐가 뭔지 헷갈려서 그냥 잘 듣는 척했다. 아마 아이들도 수업시간에 그러겠지.
연못에서 주운 우렁이껍데기를 소라껍데기라 믿으며 부모님께 선물로 드려야겠다는 아이, 물에 불은 까만 씨앗 하나를 들고선 도롱뇽 알을 찾았다며 기뻐하는 아이, 네잎클로버를 찾느라 가던 길 멈추고 땅에 코를 박는 아이. 몰두하는 아이들은 모두 어여쁘다.
연못에서 시원하게 우는 개구리 소리를 듣더니 한 아이가 툭 내뱉는다.
“아! 개구리 소리를 들으니 귀가 맑아진다.”
말만 하면 시가 되는 아이들의 말이 아까워, 적어두고 싶지만 필기구가 없고 외우고 싶지만 뇌가 도와주지 않는다. 그래서 아이에게 부디 이런 것을 여행일기에 기록하여 좀더 이어보라고 당부하지만 아이는 다 흘려보낸다. 자기가 하는 말의 아름다움을 의식하지 않고 사라져도 아까워하지 않아 더 아름다운 말들을.
그날 밤, 우리는 연못을 다시 찾아 목청도 좋은 개구리 소리를 들었다. 와글와글 밤을 깨우며 개구리 울음을 일순간에 잠재우는 어린이 마흔 명의 소란도 함께.
▷ 우리는 우연히 함께 걸었을 뿐이에요. 천생연분마을에서는 아무 일도 안 났어요.
고추가 반으로 쪼개질 것 같아요
여행을 다니며 낯선 이들의 호의를 경험하는 건 삶의 든든한 자산이다. 사람 사는 곳 어디를 가든, 문을 두드리면 열린다는 믿음을 키우므로. 장욱진미술관과 권율장군 묘를 둘러보고 숙소로 가는 드문 버스를 기다리다가 우리는 갑자기 히치하이킹을 하기로 했다.
히치하이킹! 낭만적인 여행을 이루는 풍경의 정점이자 여행에서 마주치는 짧은 환대.
히치하이킹을 하다 보면 요령이 생긴다. 운전자가 안심할 수 있는 외모, 인원에 걸맞은 차량 포착, 차가 멈추는 순간 간곡하게 부탁하며 잽싸게 올라타는 순발력이 필수. 우리는 저학년을 내세워 지나는 차를 잡기로 했다. 우리반 아이들을 편애하는 것 같아 내 입으로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아이들이 선남선녀라 외모 걱정은 안 해도 되었고 무슨 말을 내뱉어도 들어줄 수밖에 없는 귀여운 호소력이 있다. 게다가 우리 모둠 아이들 호흡이 척척, 차만 오면 얼른 올라탈 수도 있다. 그런데 그날 우리 모둠은 교사까지 모두 스물한 명! 관광버스를 잡지 않는 이상 대책이 없다. 예전에 열네 명이 5인승 차를 얻어 타기는 했지만 스물한 명이 이번에는 무슨 차를 잡아야 가능할까.
지나는 운전자도 호의를 베풀고 싶지만 차량의 크기나 안전 문제로 선뜻 마음내기 어려운 게 눈에 보였다. 여러 운전자들이 미안한 거절의 뜻으로 웃으며 손을 흔든다. 우리는 인원이 적은 것처럼 보이려고 일부가 전봇대 뒤에 숨었지만 차를 잡는 일에 흥이 난 아이들이 점점 앞으로 나왔고, 차를 잡으려는 건지 지나가는 차들에게 인사하려는 건지 알 수 없는 장면이 여럿 지나는데, 엄지를 들고 위아래위아래 열심히 팔을 흔들어대는 아이들 앞으로 갑자기 차 한 대가 섰다.
일단 차가 멈춘 게 반갑고 신기하여 성급하게 인사를 건네고는 숙소 부근 삼상초등학교를 대며 거기까지만 태워달라고 부탁드린다. 아저씨께서 사람이 많은 것 같다고 잠시 머뭇거리지만 우리는 탈 수 있다고 장담하고 방긋방긋 웃는다. 뒷좌석만으로 부족해 짐칸을 열어달라고 뻔뻔하게 부탁하고는, 위험하지 않을까 염려하는 아저씨를 안심시키고 재빨리 탄다.
고학년이 먼저 앉고 중학년이 그 무릎에 앉고 맨 위에는 몸무게 가벼운 아이들이 앉는다. 안전하게 차를 모느라 속도를 조절하는 아저씨 덕분에 시간이 천천히 간다. 땀이 쏟아지고 다리가 서서히 저려온다. 아이들이 힘들어하는 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한 아이는 그 와중에 여러 번 신음하며 말한다. “고추가 반으로 쪼개질 것 같아요.” 어떻게 앉았기에 인간의 고추가 반으로 쪼개질 듯한 기분을 느낄까. 그건 그 아이만 알겠지.
‘으으으... 스물 한 명은 너무 많아!’
우리가 힘들어하는 기색을 느끼셨는지 운전자께서 애들에게 사탕을 권한다. 그러자 뒷좌석 아이들이 부스럭 소리에 단박에 몸을 움직이고, 홍해 갈라지듯 공간이 확 트이며 숨 쉴 수 있는 공기가 흐른다. 고맙게도 내 무릎의 무게는 누군가에게 쏠렸으나, 그 무게를 떠안은 아이는 사탕의 힘으로 잘 버텼으리라 믿는다^^
아저씨는 숙소까지 우리를 데려다주셨다. 대안학교가 어떤 곳인지 누가 다니는지 몇 마디 묻고 여행 잘하라 격려하며 인사하고 떠나셨다. 30,40대 언저리의 성인남자를 지칭할 수 있는 호칭으로 ‘아저씨’만 떠올라 아저씨라고 부르지만, 정말 고맙고 고마운 훈남이었다!
해님이 들어가면 믿을 수 있다
마지막 날 모둠별 체육대회를 마친 뒤였다. 지친 아이도 벌떡 일어나게 하는 라면을 먹고 마을 뒷산인 노고산으로 간다. 산신 할미가 있었다는 전설을 간직한 노고산老姑山으로 오르려다 발길 닿는 대로 걷는다. 길옆으로는 갈대 무성한 넓은 하천이 흐른다. 깊이가 어느 정도 되는지 우리가 놀 수 있는지 살펴보려고 해님 선생님이 내려간다. 물에 들어간 선생님이 하천을 첨벙첨벙 건너며 맞은편으로 가자고 한다. 몇몇 아이들이 신나서 뒤따른다.
그 모습을 보던 한 여자아이가 내게 묻는다.
“저 물 깨끗해요?”
“아마도.”
“너무 더러운 것 같아요.”
“해님 선생님 들어가는 거 보여? 해님이 들어가면 믿을 수 있는 거야.”
그 말을 들은 아이는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해님의 뒤를 따라 물속으로 들어간다. 수질오염도를 판별하는 기준이 가야라면 아무도 안 믿지만 해님이라면 다 믿는다. 그렇게 아이를 들여보내고 나는 안 들어갔다. 물이끼가 잔뜩 낀 미끄덩미끄덩 물에 발을 담그고 싶지 않아서.
아이들은 얕은 물에 들어가 땅 짚고 헤엄치기를 한다. 멀리서 바라보면 깊은 물에서 수영하는 것 같다. 물이 맑으면 수건을 씻으며 놀고 탁하면 발을 씻으며 노는 법. 수질은 아랑곳하지 않고 물장구치는 아이들을 보니 즐겁다.
우리가 놀던 곳 근처에서 식당을 운영하시는 분이 아이들 모습을 오래, 흐뭇하게 바라보며 어디에서 왔는지 묻는다. 그분은 본인도 다녔던 삼상초등학교에 손녀를 보내는데, 손녀가 1학년이고 1학년 인원이 17명이며 전교생은 100명쯤 된다고 한다. 1학년 인원은 우리랑 똑같고 학교 규모는 우리와 비슷해서 반갑다. 삼상초등학교는 어제 히치하이킹을 할 때 말씀드린 장소라 왠지 친근하다.
“내 손녀도 1학년이요. 요즘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가르치려면 힘들어. 애들 데리고 뭘 해보겠다고 하면 할 수 없어. 저 나이 때는 다 내려놓고 그냥 지켜보는 거요.”
그러고는 한참을 서 계신다. 혹시 저기서 놀면 안 되냐고 여쭈었더니 물이 더러울 뿐이라며 여기에서 사람이 노는 줄 몰랐다는 말씀을 남기고 식당으로 들어가셨다.
제작진과 관객들, 무대 난입
드디어 뽐내기대회! 모둠끼리 화합하고 아이들의 재능을 뽐내는 시간! 이번에는 무슨 간식으로 우리의 입을 즐겁게 할까 저절로 기다리는 시간!
5,6년 전쯤이었나 ‘전’씨 성을 가진 아이 하나는 ‘전데렐라’로 화려하게 데뷔한 후 ‘뽐내기대회는 곧 연극공연’이라는 전통을 남긴 채 학교를 졸업했다. 현재 학교를 다니는 또 다른 ‘전씨’는 조만간 연극계의 신예로 자리매김할 것 같다. 랩인지 대사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문장을 술술 내뱉는 탁월한 기억력과 지적인 외모의 소유자로 척척박사 역할이 잘 어울린다.
전체여행에서 보는 연극은 그 어디에서도 보기 드물다. 아무리 긴 대사라도 단시간에 외워 말하는 배우와, 이건 영원히 리허설이라는 듯 대본을 보며 더듬더듬 읽는 배우가, 함께 무대에 오른다. 배우들의 연기가 좀 미진하다 싶으면 제작진들-모둠교사와 모둠원들-이 무대로 막 쳐들어간다. 그러면서 별 효용이 없는 연기지도를 하고, 목소리 작은 아이들에게 마이크를 대주고, 관객들을 위해 자리배치를 하고 그런다. 이 모든 게 연극 공연 중에 벌어진다. 배우들은 제작진의 노력과 상관없이 제 흥에 취해 있고 연기인지 실수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행위극을 선보인다. 우리는 연극을 보는 게 아니라 연극제작현장을 만난다. 그래도 아이들의 연극은 언제나 근사하다.
참, 3모둠은 연극을 하지 않고 짧고 굵게 노래를 했다. 여행 직전 5학년 아이들이 4.3을 주제로 연극 대본을 썼는데, 5.18이 낀 여행주간에 4.3 연극이라니! 아이들의 정성은 갸륵하나 너무나도 장엄하고 숙연하다. 미완성 대본을 마저 마무리하여 5,6학년 제주도 여행에서 선보이길 바란다.
▷ 춤추는 언니들을 보며 무대 위에 오른 1학년들. 1학년 남자아이의 옷을 눈여겨보자. 잠옷 위에 잠바를 걸치면 평상복이고, 잠바를 벗으면 실내복이고, 자리에 누우면 잠옷이다
부모님에게 쓰는 편지
여행을 가면 부모님이 쓴 편지를 여럿 앞에서 소리 내어 읽는다. 원하지 않으면 다른 친구들에게 공개하지 않지만, 될 수 있으면 다함께 읽으려고 한다. 저 아이에게 하는 다른 부모님의 말은 우리 부모님이 내게 하는 말과 닮았다. 내 편지 네 편지 읽고 듣는 동안 우리들은 안다. 자식을 믿는 마음, 넘치는 사랑, 잘 해내고 돌아오리라는 기대, 언제나 너를 바라보겠다는 한결같은 기다림이 우리 뒤를 받치고 있음을.
글을 읽다가 목이 메여 더는 말을 못 잇고 눈물을 훔치는 아이를 보면 안다. 남이 울 때 따라 우는 아이를 보면 다 안다. 알아듣든 못하든 부모님이 전하는 말이 아이들에게 스며들고 있는 것을. 함께 편지를 읽는 교사들도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나저나 부모님이 쓴 편지 읽는 마지막 밤을 기다리고 엄마아빠 그리워하며 이틀에 걸쳐 부모님에게 편지를 쓰던 아이들이 있었는데 편지가 잘 전달되었으려나.
사람이 달리 보인다
말이 아이들 귀를 지나 뇌에 당도하는 길은 왜 이리도 멀고 험한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말을 다 동원하여 요청, 당부, 설득, 명령, 협박해도 소용없다. 밥 먹고 설거지해라, 이 닦아라, 젖은 수건 널어라, 씻어라... 와 같은 내용을 목소리 톤과 어미語尾와 어순만 바꾸어 반복한다. 아!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말[言語]이 필요하다. 말을 여러 번 해봤자 교사의 목만 아픈 걸 알면서도 잔소리를 해댄다. 모든 아이들이 말을 안 듣는 게 아니다. 극소수가 신변자립과 관련된 특정한 일에서 그렇다.
말을 흘려듣던 아이도 “간식 먹자!” 이 한마디에는 번갯불처럼 움직인다. 역시나 말은 귀에다 대고 하는 게 아니라 마음에다 해야 한다. 달달함을 갈구하는 가슴을 향해! (전교생 먹을 사탕을 가져오신 수산나 선생님 고맙습니다^^)
아이가 교사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다고 얕잡아 보면 안 된다. 귀는 소홀해도 눈이 열려 있어서, 지하철에서 빈자리를 잽싸게 찾아 긴 시간 편하게 앉아서 가거나, 다른 사람이 잃어버린 물건을 귀신처럼 잘 찾아내고, 먹을 것이 있는 곳은 아무리 낯선 거리에서도 본능적으로 느낀다. 교실 안에서만 만났다면 남의 말에 관심이 없다는 말로 요약되었을지 모를 아이가, 다양한 변수와 복합적인 환경으로 점철된 여행을 관통하니 생활력 강하고 어디에 내놓아도 알아서 잘 살아갈 아이로 보인다. 사람이 달리 보이는 이런 여행으로 내 품도 조금은 넓어졌겠지.
양주, 천생연분마을
돌아오는 지하철, 배낭을 바닥에 내려놓은 아이들 모습을 보며 어느 승객이 저학년 아이에게 묻는다.
“너 초등학생이야?”
“네.”
“너네들 어디 갔다 왔어?”
“양주요.”
“가서 뭐했어?”
“잤어요.”
잤어요....!
일면 성의 없는 것처럼 들리는 대답에 승객은 아이에게 더 묻지 않았다. 그러고는 내게 말한다. “아이들이 정말 피곤해 보이네요.”
미술관을 둘러보거나 물놀이를 했던 것보다 더 중요하고 대단한 일은, 부모님과 떨어져 무려 사흘 밤을 잔 것!
▷ 나도 언젠가는 형님이 되어 침낭 들고 여행 다닐래요!
고학년은 어땠을까. 우리는 밤이면 별을 보러 나갔다. 별은 어쩌면 핑계였다. 하늘에서 반짝이는 빛보다 지상에서 떨리는 마음이 더 중요한 시절, 어둑한 곳으로 갈수록 잠시도 입을 쉬지 않고 말을 나누던 어떤 남녀들은 정분나기 좋은 밤을 즐기고 또 즐긴 듯하다. 평소에도 느꼈던 친구의 매력이 깜깜한 밤에 아이들 이끄는 모습을 통해 더욱 돋보였을 테고, 무섭고 쌀쌀한 밤을 핑계로 바짝 붙어 걷느라 조금은 좋았겠지.
나흘간 머문 양주 천생연분마을.
관객들의 박수와 호응을 유도하며 마무리잔치 예비사회자로 등극한 우리들의 강수정님
훈제오리고기 밑반찬으로 모둠원들 원기 회복시킨 두희
언제나 우리들을 다정하게 이끌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든 인서
어떤 부탁도 거부할 수 없게 만드는 해맑게 웃는 얼굴 서형
아무리 동생들이 매달려도 너그러이 받아준 지헌
여행 뒤로 갈수록 밥 먹는 양이 점점 늘어난 채원
남동생 샤워 담당 은근 친절한 세민
친구 옆에 누우면 언니를 잊고 푹 잠들었던 소현
쿨하게 동생짝 짐 챙기는 지윤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다 자기 입 앞으로 온다는 긍정적 예언자 지호
꽃을 보면 엮어서 꽃반지 꽃목걸이 만들어준 어여쁜 소윤
지하철노선을 꿰뚫고 있어 우리들이 편히 오갈 수 있게 이끌어준 지율
틈이 나면 신나게 춤추고 깔깔 웃던 서하
병원에서 돌아온 고단한 몸으로 씩씩하게 지냈던 규백
손이 필요한 곳에 조용히 손을 넣던 지원
자기가 꼭 먹고 싶었다는 쿠키를 손 내미는 사람에게 다 나눠준 승빈
지구에서 목성의 줄무늬까지 보인다는 특별한 눈의 소유자 주원
히치하이킹에서 찌부될 뻔했으나 말없이 웃기만 한 현원
세상만물에서 시를 읊는 감성충만 민규
저학년 따라다니며 살피는 모습에 다른 어린이집 교사가 혹시 교사냐고 물었다는 정아
아이들에게 즐거운 활동 제안하고 맛난 간식 건네고 낯선 길로 이끌며 활기를 더한 해님 선생님
칠보모둠~ 천생연분!
▷ 물놀이 후 길가 나무판 위에서 몸을 말리는 두 아이. 다정해도 너무 다정해~
고요한 아침, 마을 뒷산으로 이어진 작은 숲길로 발을 옮긴다. 실안개가 낀 길 위로 참개구리가 폴짝폴짝 뛰어다니고 쇠백로가 무논에서 먹이를 잡는다. (참개구리나 쇠백로, 이런 이름은 모두 우리 학교 아이들이 알려주었다.) 숲길 왼쪽으로는 작은 개울이 소리를 내며 흐른다. 머리 위 높게 자란 나무들 사이로 하얀 하늘이 흘끗 보인다. 두 아이가 주고받는 이야기가 고요한 아침에 활기를 더한다.
“이번 여행 시시하고 재미없어요.”
한 아이가 내뱉고 다른 아이가 맞장구친다. 내가 알기로 두 아이는 포근한 집과 정다운 식구들을 무척 사랑한다. 집밖으로 나가는 일을 썩 좋아하지 않고 학교 여행을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무겁다 하였다. 만약 교사들이 거친 활동을 제안했다면 눈물을 펑펑 쏟으며 실랑이를 아주 오래했을 테다. 그래서 아이들의 말이 의외다. 여느 해보다 쾌적한 숙소에서 머물렀고, 좋아하는 친구들과 어울릴 기회가 많았고, 자유시간이 넉넉했는데 말이다.
숙소에서 즐겁게 놀았던 두 아이 얼굴을 여러 번 목격했다. 여행이 왜 시시하고 재미없을까 하고 아이의 말을 따라 중얼거리니 아이가 이렇게 말한다.
“여행이 별로 안 힘들어요.”
학교에서 여행을 다녀온 이후 아이가 여행을 싫어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드물게 듣지만, 난 그 말을 안 믿는다. 언제나 여행을 힘들어하는 아이가 있지만 특정한 과거에 갇혀 있는 아이는 한 명도 없었다. 아이들은 모두 자라기 마련이고 자기 경험을 소화시키는 능력도 함께 키워간다.
이번 여행이 별로 안 힘들어서 시시하고 재미없다는 아이의 말을 들으니 내심 뿌듯했다. 아무리 여리고 약한 아이더라도 도전거리와 모험적 요소가 있는 여행을 저절로 꿈꾸고, 자기가 알고 있는 나를 뛰어넘으려는 열망을 은연중에 품는다. 교사의 강권이나 학교의 공식 활동이라는 바깥 힘에 기대기도 하지만 결국 제힘으로 앞길을 헤치며 거듭나는 게 아이들이다!
통곡의 밤을 아직도 기억한다. 집에 두고 온 엄마가 보고 싶다며 엉엉 울었던 아이들이 속출하였던 여행의 밤들을. 어르기도 달래기도 다그치기도 하다가 우리가 서로 이렇게 힘들게 하면서까지 여행을 해야 하는 건가 한숨 쉬던 순간이 있었다. 그때 울음소리의 주인공이었던 아이들이 어느덧 자라서 동생들을 이끌고 교사들을 거든다. 말로 몸으로 마음으로 교사들에게 가르침이 된다. 역시나 사람은 점점 나아지고 나이 들어도 배움의 기회는 수없이 찾아온다!
개구리 소리를 들으니 귀가 맑아진다
여행 첫날, 아이들과 마을을 둘러보다가 마을 주민들이 함께 가꾸는 거대한 연못을 찾았다. 우리 모둠에는 곤충, 조류, 파충류 등 각종 동물을 잘 아는 박사님이 있다. (그런 아이들은 다른 모둠에도 있고 학년마다 있다!) 혼자라면 스쳤을 것들을 박사님 덕에 다시 들여다본다. 박사님에게 미안하지만 아무리 알려줘도 뭐가 뭔지 헷갈려서 그냥 잘 듣는 척했다. 아마 아이들도 수업시간에 그러겠지.
연못에서 주운 우렁이껍데기를 소라껍데기라 믿으며 부모님께 선물로 드려야겠다는 아이, 물에 불은 까만 씨앗 하나를 들고선 도롱뇽 알을 찾았다며 기뻐하는 아이, 네잎클로버를 찾느라 가던 길 멈추고 땅에 코를 박는 아이. 몰두하는 아이들은 모두 어여쁘다.
연못에서 시원하게 우는 개구리 소리를 듣더니 한 아이가 툭 내뱉는다.
“아! 개구리 소리를 들으니 귀가 맑아진다.”
말만 하면 시가 되는 아이들의 말이 아까워, 적어두고 싶지만 필기구가 없고 외우고 싶지만 뇌가 도와주지 않는다. 그래서 아이에게 부디 이런 것을 여행일기에 기록하여 좀더 이어보라고 당부하지만 아이는 다 흘려보낸다. 자기가 하는 말의 아름다움을 의식하지 않고 사라져도 아까워하지 않아 더 아름다운 말들을.
그날 밤, 우리는 연못을 다시 찾아 목청도 좋은 개구리 소리를 들었다. 와글와글 밤을 깨우며 개구리 울음을 일순간에 잠재우는 어린이 마흔 명의 소란도 함께.
▷ 우리는 우연히 함께 걸었을 뿐이에요. 천생연분마을에서는 아무 일도 안 났어요.
고추가 반으로 쪼개질 것 같아요
여행을 다니며 낯선 이들의 호의를 경험하는 건 삶의 든든한 자산이다. 사람 사는 곳 어디를 가든, 문을 두드리면 열린다는 믿음을 키우므로. 장욱진미술관과 권율장군 묘를 둘러보고 숙소로 가는 드문 버스를 기다리다가 우리는 갑자기 히치하이킹을 하기로 했다.
히치하이킹! 낭만적인 여행을 이루는 풍경의 정점이자 여행에서 마주치는 짧은 환대.
히치하이킹을 하다 보면 요령이 생긴다. 운전자가 안심할 수 있는 외모, 인원에 걸맞은 차량 포착, 차가 멈추는 순간 간곡하게 부탁하며 잽싸게 올라타는 순발력이 필수. 우리는 저학년을 내세워 지나는 차를 잡기로 했다. 우리반 아이들을 편애하는 것 같아 내 입으로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아이들이 선남선녀라 외모 걱정은 안 해도 되었고 무슨 말을 내뱉어도 들어줄 수밖에 없는 귀여운 호소력이 있다. 게다가 우리 모둠 아이들 호흡이 척척, 차만 오면 얼른 올라탈 수도 있다. 그런데 그날 우리 모둠은 교사까지 모두 스물한 명! 관광버스를 잡지 않는 이상 대책이 없다. 예전에 열네 명이 5인승 차를 얻어 타기는 했지만 스물한 명이 이번에는 무슨 차를 잡아야 가능할까.
지나는 운전자도 호의를 베풀고 싶지만 차량의 크기나 안전 문제로 선뜻 마음내기 어려운 게 눈에 보였다. 여러 운전자들이 미안한 거절의 뜻으로 웃으며 손을 흔든다. 우리는 인원이 적은 것처럼 보이려고 일부가 전봇대 뒤에 숨었지만 차를 잡는 일에 흥이 난 아이들이 점점 앞으로 나왔고, 차를 잡으려는 건지 지나가는 차들에게 인사하려는 건지 알 수 없는 장면이 여럿 지나는데, 엄지를 들고 위아래위아래 열심히 팔을 흔들어대는 아이들 앞으로 갑자기 차 한 대가 섰다.
일단 차가 멈춘 게 반갑고 신기하여 성급하게 인사를 건네고는 숙소 부근 삼상초등학교를 대며 거기까지만 태워달라고 부탁드린다. 아저씨께서 사람이 많은 것 같다고 잠시 머뭇거리지만 우리는 탈 수 있다고 장담하고 방긋방긋 웃는다. 뒷좌석만으로 부족해 짐칸을 열어달라고 뻔뻔하게 부탁하고는, 위험하지 않을까 염려하는 아저씨를 안심시키고 재빨리 탄다.
고학년이 먼저 앉고 중학년이 그 무릎에 앉고 맨 위에는 몸무게 가벼운 아이들이 앉는다. 안전하게 차를 모느라 속도를 조절하는 아저씨 덕분에 시간이 천천히 간다. 땀이 쏟아지고 다리가 서서히 저려온다. 아이들이 힘들어하는 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한 아이는 그 와중에 여러 번 신음하며 말한다. “고추가 반으로 쪼개질 것 같아요.” 어떻게 앉았기에 인간의 고추가 반으로 쪼개질 듯한 기분을 느낄까. 그건 그 아이만 알겠지.
‘으으으... 스물 한 명은 너무 많아!’
우리가 힘들어하는 기색을 느끼셨는지 운전자께서 애들에게 사탕을 권한다. 그러자 뒷좌석 아이들이 부스럭 소리에 단박에 몸을 움직이고, 홍해 갈라지듯 공간이 확 트이며 숨 쉴 수 있는 공기가 흐른다. 고맙게도 내 무릎의 무게는 누군가에게 쏠렸으나, 그 무게를 떠안은 아이는 사탕의 힘으로 잘 버텼으리라 믿는다^^
아저씨는 숙소까지 우리를 데려다주셨다. 대안학교가 어떤 곳인지 누가 다니는지 몇 마디 묻고 여행 잘하라 격려하며 인사하고 떠나셨다. 30,40대 언저리의 성인남자를 지칭할 수 있는 호칭으로 ‘아저씨’만 떠올라 아저씨라고 부르지만, 정말 고맙고 고마운 훈남이었다!
해님이 들어가면 믿을 수 있다
마지막 날 모둠별 체육대회를 마친 뒤였다. 지친 아이도 벌떡 일어나게 하는 라면을 먹고 마을 뒷산인 노고산으로 간다. 산신 할미가 있었다는 전설을 간직한 노고산老姑山으로 오르려다 발길 닿는 대로 걷는다. 길옆으로는 갈대 무성한 넓은 하천이 흐른다. 깊이가 어느 정도 되는지 우리가 놀 수 있는지 살펴보려고 해님 선생님이 내려간다. 물에 들어간 선생님이 하천을 첨벙첨벙 건너며 맞은편으로 가자고 한다. 몇몇 아이들이 신나서 뒤따른다.
그 모습을 보던 한 여자아이가 내게 묻는다.
“저 물 깨끗해요?”
“아마도.”
“너무 더러운 것 같아요.”
“해님 선생님 들어가는 거 보여? 해님이 들어가면 믿을 수 있는 거야.”
그 말을 들은 아이는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해님의 뒤를 따라 물속으로 들어간다. 수질오염도를 판별하는 기준이 가야라면 아무도 안 믿지만 해님이라면 다 믿는다. 그렇게 아이를 들여보내고 나는 안 들어갔다. 물이끼가 잔뜩 낀 미끄덩미끄덩 물에 발을 담그고 싶지 않아서.
아이들은 얕은 물에 들어가 땅 짚고 헤엄치기를 한다. 멀리서 바라보면 깊은 물에서 수영하는 것 같다. 물이 맑으면 수건을 씻으며 놀고 탁하면 발을 씻으며 노는 법. 수질은 아랑곳하지 않고 물장구치는 아이들을 보니 즐겁다.
우리가 놀던 곳 근처에서 식당을 운영하시는 분이 아이들 모습을 오래, 흐뭇하게 바라보며 어디에서 왔는지 묻는다. 그분은 본인도 다녔던 삼상초등학교에 손녀를 보내는데, 손녀가 1학년이고 1학년 인원이 17명이며 전교생은 100명쯤 된다고 한다. 1학년 인원은 우리랑 똑같고 학교 규모는 우리와 비슷해서 반갑다. 삼상초등학교는 어제 히치하이킹을 할 때 말씀드린 장소라 왠지 친근하다.
“내 손녀도 1학년이요. 요즘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가르치려면 힘들어. 애들 데리고 뭘 해보겠다고 하면 할 수 없어. 저 나이 때는 다 내려놓고 그냥 지켜보는 거요.”
그러고는 한참을 서 계신다. 혹시 저기서 놀면 안 되냐고 여쭈었더니 물이 더러울 뿐이라며 여기에서 사람이 노는 줄 몰랐다는 말씀을 남기고 식당으로 들어가셨다.
제작진과 관객들, 무대 난입
드디어 뽐내기대회! 모둠끼리 화합하고 아이들의 재능을 뽐내는 시간! 이번에는 무슨 간식으로 우리의 입을 즐겁게 할까 저절로 기다리는 시간!
5,6년 전쯤이었나 ‘전’씨 성을 가진 아이 하나는 ‘전데렐라’로 화려하게 데뷔한 후 ‘뽐내기대회는 곧 연극공연’이라는 전통을 남긴 채 학교를 졸업했다. 현재 학교를 다니는 또 다른 ‘전씨’는 조만간 연극계의 신예로 자리매김할 것 같다. 랩인지 대사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문장을 술술 내뱉는 탁월한 기억력과 지적인 외모의 소유자로 척척박사 역할이 잘 어울린다.
전체여행에서 보는 연극은 그 어디에서도 보기 드물다. 아무리 긴 대사라도 단시간에 외워 말하는 배우와, 이건 영원히 리허설이라는 듯 대본을 보며 더듬더듬 읽는 배우가, 함께 무대에 오른다. 배우들의 연기가 좀 미진하다 싶으면 제작진들-모둠교사와 모둠원들-이 무대로 막 쳐들어간다. 그러면서 별 효용이 없는 연기지도를 하고, 목소리 작은 아이들에게 마이크를 대주고, 관객들을 위해 자리배치를 하고 그런다. 이 모든 게 연극 공연 중에 벌어진다. 배우들은 제작진의 노력과 상관없이 제 흥에 취해 있고 연기인지 실수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행위극을 선보인다. 우리는 연극을 보는 게 아니라 연극제작현장을 만난다. 그래도 아이들의 연극은 언제나 근사하다.
참, 3모둠은 연극을 하지 않고 짧고 굵게 노래를 했다. 여행 직전 5학년 아이들이 4.3을 주제로 연극 대본을 썼는데, 5.18이 낀 여행주간에 4.3 연극이라니! 아이들의 정성은 갸륵하나 너무나도 장엄하고 숙연하다. 미완성 대본을 마저 마무리하여 5,6학년 제주도 여행에서 선보이길 바란다.
▷ 춤추는 언니들을 보며 무대 위에 오른 1학년들. 1학년 남자아이의 옷을 눈여겨보자. 잠옷 위에 잠바를 걸치면 평상복이고, 잠바를 벗으면 실내복이고, 자리에 누우면 잠옷이다
부모님에게 쓰는 편지
여행을 가면 부모님이 쓴 편지를 여럿 앞에서 소리 내어 읽는다. 원하지 않으면 다른 친구들에게 공개하지 않지만, 될 수 있으면 다함께 읽으려고 한다. 저 아이에게 하는 다른 부모님의 말은 우리 부모님이 내게 하는 말과 닮았다. 내 편지 네 편지 읽고 듣는 동안 우리들은 안다. 자식을 믿는 마음, 넘치는 사랑, 잘 해내고 돌아오리라는 기대, 언제나 너를 바라보겠다는 한결같은 기다림이 우리 뒤를 받치고 있음을.
글을 읽다가 목이 메여 더는 말을 못 잇고 눈물을 훔치는 아이를 보면 안다. 남이 울 때 따라 우는 아이를 보면 다 안다. 알아듣든 못하든 부모님이 전하는 말이 아이들에게 스며들고 있는 것을. 함께 편지를 읽는 교사들도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나저나 부모님이 쓴 편지 읽는 마지막 밤을 기다리고 엄마아빠 그리워하며 이틀에 걸쳐 부모님에게 편지를 쓰던 아이들이 있었는데 편지가 잘 전달되었으려나.
사람이 달리 보인다
말이 아이들 귀를 지나 뇌에 당도하는 길은 왜 이리도 멀고 험한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말을 다 동원하여 요청, 당부, 설득, 명령, 협박해도 소용없다. 밥 먹고 설거지해라, 이 닦아라, 젖은 수건 널어라, 씻어라... 와 같은 내용을 목소리 톤과 어미語尾와 어순만 바꾸어 반복한다. 아!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말[言語]이 필요하다. 말을 여러 번 해봤자 교사의 목만 아픈 걸 알면서도 잔소리를 해댄다. 모든 아이들이 말을 안 듣는 게 아니다. 극소수가 신변자립과 관련된 특정한 일에서 그렇다.
말을 흘려듣던 아이도 “간식 먹자!” 이 한마디에는 번갯불처럼 움직인다. 역시나 말은 귀에다 대고 하는 게 아니라 마음에다 해야 한다. 달달함을 갈구하는 가슴을 향해! (전교생 먹을 사탕을 가져오신 수산나 선생님 고맙습니다^^)
아이가 교사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다고 얕잡아 보면 안 된다. 귀는 소홀해도 눈이 열려 있어서, 지하철에서 빈자리를 잽싸게 찾아 긴 시간 편하게 앉아서 가거나, 다른 사람이 잃어버린 물건을 귀신처럼 잘 찾아내고, 먹을 것이 있는 곳은 아무리 낯선 거리에서도 본능적으로 느낀다. 교실 안에서만 만났다면 남의 말에 관심이 없다는 말로 요약되었을지 모를 아이가, 다양한 변수와 복합적인 환경으로 점철된 여행을 관통하니 생활력 강하고 어디에 내놓아도 알아서 잘 살아갈 아이로 보인다. 사람이 달리 보이는 이런 여행으로 내 품도 조금은 넓어졌겠지.
양주, 천생연분마을
돌아오는 지하철, 배낭을 바닥에 내려놓은 아이들 모습을 보며 어느 승객이 저학년 아이에게 묻는다.
“너 초등학생이야?”
“네.”
“너네들 어디 갔다 왔어?”
“양주요.”
“가서 뭐했어?”
“잤어요.”
잤어요....!
일면 성의 없는 것처럼 들리는 대답에 승객은 아이에게 더 묻지 않았다. 그러고는 내게 말한다. “아이들이 정말 피곤해 보이네요.”
미술관을 둘러보거나 물놀이를 했던 것보다 더 중요하고 대단한 일은, 부모님과 떨어져 무려 사흘 밤을 잔 것!
▷ 나도 언젠가는 형님이 되어 침낭 들고 여행 다닐래요!
고학년은 어땠을까. 우리는 밤이면 별을 보러 나갔다. 별은 어쩌면 핑계였다. 하늘에서 반짝이는 빛보다 지상에서 떨리는 마음이 더 중요한 시절, 어둑한 곳으로 갈수록 잠시도 입을 쉬지 않고 말을 나누던 어떤 남녀들은 정분나기 좋은 밤을 즐기고 또 즐긴 듯하다. 평소에도 느꼈던 친구의 매력이 깜깜한 밤에 아이들 이끄는 모습을 통해 더욱 돋보였을 테고, 무섭고 쌀쌀한 밤을 핑계로 바짝 붙어 걷느라 조금은 좋았겠지.
나흘간 머문 양주 천생연분마을.
관객들의 박수와 호응을 유도하며 마무리잔치 예비사회자로 등극한 우리들의 강수정님
훈제오리고기 밑반찬으로 모둠원들 원기 회복시킨 두희
언제나 우리들을 다정하게 이끌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든 인서
어떤 부탁도 거부할 수 없게 만드는 해맑게 웃는 얼굴 서형
아무리 동생들이 매달려도 너그러이 받아준 지헌
여행 뒤로 갈수록 밥 먹는 양이 점점 늘어난 채원
남동생 샤워 담당 은근 친절한 세민
친구 옆에 누우면 언니를 잊고 푹 잠들었던 소현
쿨하게 동생짝 짐 챙기는 지윤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다 자기 입 앞으로 온다는 긍정적 예언자 지호
꽃을 보면 엮어서 꽃반지 꽃목걸이 만들어준 어여쁜 소윤
지하철노선을 꿰뚫고 있어 우리들이 편히 오갈 수 있게 이끌어준 지율
틈이 나면 신나게 춤추고 깔깔 웃던 서하
병원에서 돌아온 고단한 몸으로 씩씩하게 지냈던 규백
손이 필요한 곳에 조용히 손을 넣던 지원
자기가 꼭 먹고 싶었다는 쿠키를 손 내미는 사람에게 다 나눠준 승빈
지구에서 목성의 줄무늬까지 보인다는 특별한 눈의 소유자 주원
히치하이킹에서 찌부될 뻔했으나 말없이 웃기만 한 현원
세상만물에서 시를 읊는 감성충만 민규
저학년 따라다니며 살피는 모습에 다른 어린이집 교사가 혹시 교사냐고 물었다는 정아
아이들에게 즐거운 활동 제안하고 맛난 간식 건네고 낯선 길로 이끌며 활기를 더한 해님 선생님
칠보모둠~ 천생연분!
▷ 물놀이 후 길가 나무판 위에서 몸을 말리는 두 아이. 다정해도 너무 다정해~
믿는 것 이상으로 자라준 아이들에게 그저 고맙다 해야하겠지요?
물흐르듯 신나게 읽다가도 읽고나서 깊은 여운이 있는 가야선생님 여행후기.. 감사합니다.^^*
늘 그랬듯이 지율이는 이번 양주여행이 너무나 재밌었다며 3박4일의 모험담을 장장 두시간에 걸쳐 자세히 풀어냈답니다. 아이에게 들었던 이야기에 선생님의 사진과 이야기가 더해지니 재밌는 성장영화한편을 본 것 같아요.^^ 자세한 여행후기 감사합니다.
"여행 걱정"을 늘, 달고 사는 아이가,
해가 지날 수록 가뿐하게 다녀 오는 것을 관찰합니다.
우리 칠보산 자유학교의 힘, "학교여행" 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