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읽는다

작성자
가야
작성일
2016-07-16 11:28
조회
1663
매주 한 편의 시를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아침마다 4학년 아이들과 읽었다.
문학나눔 도서에서 고른 시인들이 쓴 동시, 글쓰기회보에 실린 또래들의 시, 잘 알려진 시인들의 시를 고루 만났다.

이번 주에 수업을 마무리하면서 열여덟 편의 시 가운데 내 마음에 드는 작품을 아이들 목소리로 낭송했다. 그 시를 택한 까닭을 밝히기도 했다.
무엇이 왜 좋은지 차근차근 풀어내기 어려워 “그냥”이라고 말하는 아이가 많았다.
좋은 데 달리 이유가 있겠는가. 아이의 선택이 곧 선택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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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검사>

-혼내지 마세요, 샘!
정말로 어제 하루는

아무것도 쓸 게 없는
그런 날이었어요.

맞아요!
딱 한 번 생선 트럭이
왔다 가긴 했지만요

매미 소리가 온 동네를
들었다 놨다 하는 통에
깜짝 놀란 능소화가
후둑후둑 졌고요.
더워서
개미도 한 마리
꿈쩍하지 않았어요.

-혼내지 마세요, 샘!
정말로 어제 하루는

아무것도 쓸 게 없는
그런 날이었어요.

맞아요!
고추잠자리 배앵뱅,
저를 꾀긴 했지만요.

한 달에 한두 번 일기를 쓰면서도 참 당당한 아이가 골라 읽었다.
이번 여름방학 때 하루라도 일기를 빼먹으면 어마어마하게 많은 숙제를 내주겠다고 엄포를 놓았는데, 이런 시를 골라서 재치 있는 항변을 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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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냇물의 손>

시냇가의 조약돌을
쓰다듬던 손으로
갈대의 아픈 발목을 만져주고
물장구치러 나온 아이들의
엉덩이도 간질여주고
바닥에 부드러운 물풀을 키워
물고기들을 먹이는

시냇물의 손

장난이 심해 꾸중을 듣곤 하는 아이가 골라 읽었다.
시냇물이 평범하지 않고 참 재미있어 보인다고 했다.
지금은 자꾸 친구들을 간질이지만,
아이는 시냇물의 손을 꿈꾸고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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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하는 아이는 괴테의 잠언을 골랐다.
착한 일을 하고 보답을 기대하지 말라는 메시지가 담긴 시인데
느낌이 좋다고 했다.

「나의 화살은 활을 떠났어요,
몹시도 아름답게 깃털 달고.
온 하늘 열려 있었으니
어디엔가 맞았을 테지요.」

아이는 언젠가 친구관계가 좀 힘들다며
사람이 착하게 살아도 별 소용이 없다고 툭 내뱉은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이 시를 고른 걸 보니 선한 삶이 아이의 숙명일 수밖에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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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이는 정현종의 <비스듬히>를 골랐다.
시 전문은 이렇다.

비스듬히

생명은 그래요.
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나요?
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나무들 좀 보세요.

우리는 기대는 데가 많은데
기대는 게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니
우리 또한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지요.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

 

나도 참 좋아하는 시라서 반가운 마음에 물었다.

-왜 이 시를 골랐어?
-전 똑바로 앉는 게 어렵고 맨날 비스듬히 앉아서요.

허리를 세우고 바르게 앉으라며 끊임없이 잔소리를 건넸던 아이.
아이가 비스듬히 앉는 데는 이렇게 낭만적인 이유가 있었다.
삐뚤게 앉은 게 아니라
비스듬히 공기에 기대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아이에게 더 이상 뭐라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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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학기 마무리하는 요즘, 안 그래도 많은 잔소리가 더 늘었는데
시를 읽고 고르는 아이들의 마음 떠올리며 나를 좀 가다듬어야겠다.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우리이므로!

 
전체 3

  • 2016-07-16 21:45
    시가 어렵지 않고, 시를 편하게 대하는 자유학교 어린이들.. 커서도 한참동안 시가 쉽지 않았던 저에게는 부러운 모습이에요.. ^^

  • 2016-07-16 21:55
    아이들이 읽은 것도 '시'이지만..............

    선생님의 글도 모두 '시'입니다.
    ~재치있는 항변
    ~선한 삶이 아이의 숙제
    ~비스듬히 공기에 기댄 아이

  • 2016-07-19 09:21
    저는 아직도 시가 어려운데.. 눈이 잘 안가는데... 아이들은 시의 매력을 몸으로 알아가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