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랄한 1학년

작성자
가야
작성일
2017-09-10 18:56
조회
1570


#1. 우정

며칠 전 점심시간, 남자아이 하나가 밥을 먹다가 이런다.
“선생님, 저 얼굴에 여드름 나는 것 같아요.”

여드름은커녕 잡티 하나 안 보이는 얼굴을 보며 나는 이리 말한다.
“축하해~ 여드름 나면 이제 곧 어른이 되는 건데.”

“와! 나 어른 된대.”

그 이야기를 듣던 맞은편 남자아이는 걱정스런 얼굴이다.
“야, 너 어른 되면 회사 다니고 밤늦게 와. 우리 아빠는 밤 열 시도 넘어서 오셔.”

여드름이 나는 것 같다고 믿는 아이는 기뻐한다.
“우리 아빠도 막 열 시 넘어서 와. 우와~ 나도 어른 되면 열 시 넘어서 집에 들어간다아아!”
(여드름 날 예정인 아이는 말에 '막'을 막 섞는 습관이 있다.)

저녁이 있는 삶보다 어른 될 꿈에 부풀어 있는 아이에게
이 나라 남자어른의 운명을 간파하는 아이가 다른 걱정을 보탠다.
“야, 너 스무 살 되면 군대 가야 해! 난 군대 가기 싫어. 사람에게 총을 쏘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해!”

십 년 후면 걱정스런 아이의 걱정이 덜어질까.
꿈에 찬 아이는 12년 뒤에 한반도에 거주할지 모를 친구에게 단호하게 말한다.

“알았어. 군대는 내가 갈게.”

하하하^^
너희들 모두 군대 안 갈 수 있게 우리 어른들이 노력해야 할 게 많구나!




#2. 선생님을 응원합니다.

생태관에서 연극을 보고 돌아오던 길이다.
몇몇 친구들이 걷기만 하니까 너무 힘들다고 한다.
혹시 몰라 교통카드 가져오라 했는데 그것 때문에 더 힘들단다.
버스 탈 줄 알았는데 안 타니까 속상해서.
이제는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라고 꼬드기며 걷는데
어떤 아이가 업어달라 한다.
너무 힘들어서 도저히 못 가겠다고 떼를 쓴다.
손은 벌써 허리를 꽉 붙들고 안 놓는다.

그래서 그 아이 업는 시늉을 한다.
“아이구, OO를 업으니까 선생님보다 훨씬 크고 튼튼해서 내가 걸을 수가 없네.
이제 다 컸구나. 혼자서도 잘 걸어가겠네.
선생님은 너무 늙어서 업을 수도 없겠다, 아이구 허리야.
어디 얼마나 잘 가나 봐야겠다. 내가 쫓아가야지!”

튼튼하고 씩씩한 아이들 칭찬과 늙어버린 내 사정을 토로하는 푸념이 골고루 섞인 사설을 길게길게 풀어놓으면 아이들은 얼른 내려와서는 언제 힘들었냐는 듯 저만큼 내달린다.
그렇게 네 명의 아이들과 장난하며 걸어오는데 한 남자아이가 자기도 업어달란다.

업자마자 앞의 네 아이에게 그랬던 것처럼
너는 튼튼하고 나는 늙었다, 네 힘으로 잘 걸어보아라..
이런 이야기를 줄줄 하니까
등에 업혀 내 목 앞으로 손을 깍지 낀 아이가 목을 더 조르며 말했다.

“선생님! 어서 힘내야지요!”




#3. 너는 음유시인이다

바다별 선생님이 1학년들 놀라고 철봉에 굵은 밧줄을 매달아 그네처럼 만들어놓았다.
그 덕에 여러 아이들에게 그네 놀이터가 생겼다.
지난 금요일, 목소리 우렁찬 남자아이가
그네 타는 아이들 곁에서 신나게 노래를 불렀다.
노랫말도 곡조도 떠오르는 대로 즉석에서 부르는 거라고 한다.

까만 아이 노래 한 줄 부르면 아이들 웃음소리 까르르.
목에 핏대 세운 목소리로 한 줄 부르면 더 요란하게 까르르깔깔.

내가 들은 대목은 이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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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에 갔네.
새우튀김이 먹고 싶었네.

강아지가 있었네.
다리가 여섯 개였네.

장수풍뎅이가 있었네.
다리가 여덟 개였네.

OOO가 있었네.
다리가 열두 개였네.

쇠똥구리가 똥을 쌌네.
똥을 굴렸네.
지구만한 똥이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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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우튀김에서 시작한 식욕이 지구적 스케일의 배설로 확장되는데
그 과정에 아이가 좋아하는 강아지나 곤충들이 등장한다.
처용은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뉘 것인고 읊었다지.
본디 가진 것보다 더 많은, 저 남은 둘은 뉘 것인고.
식욕을 노래로 승화한 [준영가]를 문집에 꼭 실어야겠구나!

전체 1

  • 2017-10-09 21:16
    라임도 살아있는 준영가네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