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건네는 이야기

작성자
가야
작성일
2017-03-19 00:19
조회
2040
점심시간이다. 둥지층은 재잘거리는 아이들을 거대한 새둥지처럼 품고 있다. 새둥지와 둥지층이 다른 점은, 새들은 둥지 안에서 바닥이 꺼져라 하고 뛰어다니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2학년 류○진이 계단에 앉아 1학년 남자아이들이 다른 학년과 뒤섞여 노는 모습을 내려다본다. 학교 안에서는 뛰어놀지 말고, 뛰어놀려면 무조건 밖에 나가라 했는데 형들과 노는 게 재미있는 1학년이 그 말을 귀담아 들을 리가 없다.

1,2학년 생태교실 때 우리 모둠에서 확인한 바, 류○진의 말과 행동에선 진정한 형님 포스가 마구 뿜어져 나온다. 딱 한마디를 부드럽게 던지면 동생들이 스르륵 움직인다. 아이들의 다음 행동이 어떠할지 예측하는 힘도 있다. 난 류상○에게 저 왁자지껄 사태에서 우리 1학년 좀 건져오라 부탁하려고 곁에 앉았다. 그런데 상○이가 느긋하게 말을 꺼낸다.

“선생님, 이번 1학년들이 2학년이 되면 큰일 날 것 같아요.”
“왜?”
“지금도 저렇게 난장판인데 2학년이 되면 더 난장판이 될 거잖아요.”

난.장.판......이라니! 우리의 1학년 아이들이 뛰어노는 사태는 2학년 형님이 보기에 ‘난장판’인 게다!
이 아이의 예측능력을 깎아내리고 부정하기 위해서, 의젓한 아이의 과거를 굳이 불러온다.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4학년 교실 창문을 넘나들며 연못부터 분리수거장까지 관통하고 다시 1학년 교실로 돌아가다가 내게 붙들려 야단을 맞았던, 실내화를 실외화처럼 자유롭게 신었던 시절을.

“너희 4인방은 1학년 때 나한테 자주 혼났잖아.”
내 말에 과거를 잠시 돌이키는 아이가 흐뭇한 표정으로 답한다.
“네, 우리가 더했네요.”
그러고는 아이들 노는 모습을 여유롭게 본다. 모든 사람에게는 저런 시절이 있다는 듯이.

그나저나 난장판! 그 말이 우리반의 한 해를 예감하는 듯해 머릿속에서 떨쳐보려 하지만, “운명이란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피할 수 있음에도 피하지 않음”이라 하였던 유치환의 시 한 구절이 절로 떠올라버린다. 에잇!!



어느덧 금요일 학교밖학교. 우리는 가볍게 시작한다. 학교에서 6단지 두레뜰공원까지 걸어가기로 한다. 아이들이 씩씩하고 활기차고 발랄하게 잘 걷는다. 힘들다는 아이 하나 없이 즐겁게 간다.

어머나 세상에나! 이 학교에 괜히 왔다고 후회하는 아이가 벌써 나타난다. 까닭인즉슨, 길을 걸을 때 짝 손을 잡고 다녀야 하고, 놀이터에서 놀기 싫은데 아이들과 선생님들은 놀자고 하고, 놀아보니까 재미있어서 더 놀고 싶은데 다음 목적지로 가야 하고, 물에 발 담그고 노는 재미가 좋았는데 학교로 갈 시간이 되어서 그렇다. 1학년다운 귀여운 후회이다^^ 후회해도 소용없다. 이 학교 교사들이 물귀신이라 한번 들어오면 쉽게 안 놓아준다.

남의 아이와 지내니까 좋은 게 있다면, 아이들이 아무리 더럽게 놀아도 개의치 않을 수 있다는 사실. 만약 내 아이라면, 날마다 쏟아져 나오는 빨랫감을 떠올리며 제발 깨끗하게 살든지 빨래는 네 손으로 하든지 선택하라며 잔소리를 해댔겠지. 나는 이 아이들의 빨래에서 자유로운 사람! 야호!! (부모님들께는 죄송하지만^^;)
간식을 다 먹은 아이들은 공원 옆 하천으로 간다. 한 명이 가니 우르르 몰려간다. 물만 있으면 벌어지는 일이지만, 누군가 실수로 이번에도 분명 실수로 빠진다. 아이는 신발을 벗고 양말을 벗어 돌 위에 말린 다음 맨발로 물에서 논다. 그걸 본 아이들은 신과 양말을 벗고 따라서 발을 담근다. 내 손을 담가 보니 차갑기는 말도 못하고, 눈으로 보니 더럽기도 말로 못할 그 물에. 미끄덩거리는 물질이라든지 건더기 같은 것들을 사방팔방 다 묻혀가면서 말이다.

점심시간이 코앞에 닥치니 마음이 바빠져 놀던 아이들을 불러낸다. 팔다리와 옷에 묻은 미끌미끌한 진흙을 아이들은 갖은 방법으로 털어낸다.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놀던 물에 씻어 내거나 마른 풀로 닦는 거다. 젖은 피부를 살랑 봄바람에 말린 다음 손으로 탁탁 터는 아이도 보이고, 강아지풀을 뜯어서 세월아 네월아 하며 살살 닦아내는 친구도 있다. 각양각색 아이들의 공통점이라고 하면, 교사의 기대보다는 아이들 행동이 그리 빠르지 않다는 것이겠다.
그러다가 정성껏 진흙을 닦아내는 어떤 아이를 내 눈이 봐버린다. 어쩌면 안 보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볕이 잘 드는 나무다리에 앉아 발등과 발가락과 발목 부근을 차례차례 문지르던 그 아이 말이다. 대충 털어냈으면 얼른 학교 가자고 말하려고 아이에게 다가갔다. 아이는 내 기척을 모르고 축축한 진흙을 열심히 떨쳐내고 있었다. 아이가 쓰던 방법은 지금까지 한 번도 목격하지 못했고 보통 사람들이라면 시도조차 할 수 없는 방법이었다. 우리반 아이는 독특한 액체로 살의 진흙을 고이고이 닦아내었는데, 기포가 몽글몽글 살아서 숨 쉬고 있는 액체는 바로바로, 아이가 생산한 침이었다! 저걸 다 어떻게 모았을까 싶을 정도로 놀라웠던, 어마어마한 양의 타액. 아무렇게나 흘러내리지 않을 정도의 적절한 점성 덕분에 아이의 살에는 다량의 침이 작은 부침개처럼 퍼져 있었고, 아이의 입술 주변에도 흘러나올 준비를 하고 있는 침의 흔적이 보였다. 아! 범띠인 이 아해들이 고양잇과의 세안방식을 흉내 내어 혀로 핥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판이다. 흐흐흑. (이 아이는 더럽다고 말려도 개의치 않고, 2차 세척을 하였다. 이번에는 바닥에 침을 모아서^^)

어쨌거나 아이들은 갈 채비를 다했다! 그런데 한 아이가 신발이 다 젖어버려서 신고 갈 수 없다고 한다. 그럼 양말을 신고 가면 되지! 그런데 양말까지 젖어서 그것도 불편하단다. 그럼 맨발로 걸어가면 되지! 그러니 아이는 폴짝폴짝 뛰면서 좋아한다. 그렇게 공원에서 학교까지 양손에 젖은 신발 한 짝씩 쥐고 맨발로 걷는다. 발바닥이 곰발바닥처럼 두꺼운 아이는 풀밭이며 시멘트길 위를 마구 뛰어다닌다.

“와~ 너 맨발로 정말 잘 걷는다. 너, 우리 고향에 한번 데려가고 싶다.”
유년을 소박한 시골에서 보낸 나는, 야생성이 넘치는 아이를 보면 기쁘고 반갑고 무언가가 그리워지기도 해서, 옛 모습이 거의 남아 있지도 않은 우리 고향에 데려가고 싶다는 말을 꺼내곤 한다. 그 전의 아이들 가운데 누군가도, 작년 우리반 몇몇 친구도 이 말을 들었고, 그럼 아이들은 “선생님 고향이 어디예요?”라는 질문으로 대화를 이어가곤 했다.

그런데 우리의 1학년 아이는 까만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이리 묻는다.
“선생님 고향 사람들은 맨발로 다녀요?”
하하하! 나중에 이 아이를 우리 고향에 데려가면 사람들에게 부탁해야겠다. 이 아이 앞에서는 꼭 맨발로 걸어달라고. 이참에 고향을 바꾸는 게 더 빠른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를 놀랍게 할 1학년 아이들이 건네는 이야기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밤마다 쏟아지는 잠을 따르느라 이만 마친다. 아이들이 건네줄 새로운 이야기를 기대하며!
전체 5

  • 2017-03-20 05:06
    기상천외한 타액 얘기와 아이들 얘기가 그 어느 예능보다 재미집니다.
    빨래는 아이들이 직접 하든지 아니면 아빠들이 해야죠. 안나아빠는 안나 양말 손빨래 3년 했습니다. 호호

  • 2017-03-20 16:08
    열심히 읽다가 아들 이야기가 나와 깜짝 놀란 1인입니다. ^^

  • 2017-03-20 18:38
    가야선생님 고향이 궁금해 지는 1인입니다!!
    ㅋ ㅋ웃으면서, 글 잘 보았어요^^

  • 2017-03-26 22:02
    반짝반짝 빛나는 즐거운 난장판이네요^^

  • 2017-04-15 20:57
    저도 가야선생님 고향이 매우 궁금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