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터기와 해님의 연수후기를 읽고...

작성자
가야
작성일
2016-08-29 08:07
조회
1678
두 분의 연수후기를 읽고 어마어마한 감동이 밀려왔다. 연수랄 것도 없는 아주 소박한 자리였을 뿐인데 연수라니 말이다.

새로 오신 교사들은 언제나 이런 전제에서 출발한다.
“아직 학교문화를 잘 몰라서 그러는데...”
올해 학교에 온 두 분의 교사가 자주 했던 말이다. 건강한 생각을 펼칠 힘이 있는 이들인데 학교문화를 잘 모르는 것 때문에 자기의 생각을 전개하는 데 걸림돌이 되어선 안 되겠다 싶어 최소의 기본만, 디딤돌 정도만 나누고 싶었다. 그러니까 생활을 통해 체득할 몫은 그것대로 남겨두고, 교육과정과 교육활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내용이 있으면 한결 낫겠다고 여겼다. 새로 온 사람들이 ‘신입’이라는 이름 때문에, 아직은 낯선 공간에서 미숙함이 좀 더 부각되는 건 아닌지 옆에서 괜히 미안하고 때로는 조바심이 나기도 했다.

무엇을 나눌까. 어떤 건 너무 당연하고 잘 알 법한 내용이라 넣기가 좀 그랬고, 이미 알고 있는 것이라도 함께 나누면 새로운 의미를 발견할 수 있으니 넣는 게 맞는 것 같았고. 그렇게 떼고 붙이고를 반복하는 사이에 시간은 자꾸 흐르고 내용이 지엽적이고 빈약해져버렸다. (덕분에 이오덕 선생님을 찬찬히 살필 수 있어서 고마웠다^^)


‘자기가 뭐라고 황금 같은 방학에 만나자고 한담. 잘난 척하는 거야 뭐야.’ 어쩌면 이렇게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학교에서의 경력만 내가 조금 많을 뿐이지 삶의 경험치는 나보다 훨씬 풍성하고 깊은 두 분이다. 게다가 사람들은 자기에게 필요한 공부가 무언지 스스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대체로 그 생각은 타당한데다가, 우리의 몸과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다른 사람이 이러자 저러자 하는 걸 이래라 저래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결론을 말하면 두 분이 워낙 자발적인 분이라서 각자 알아서 공부할 계획이었는데, 그 자리에 내가 낀 것과 다름없었다^^

판단과 평가가 없는 경청이 최고의 지성이라고 한다. 난 이와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다. 그런데 두 분의 태도에서 때때로 최고의 지성을 만났다. 두 교사가 읽을거리를 마냥 수용하거나 상대방 말을 무조건 경청했다는 뜻이 아니다. 어떤 내용을 대할 때 여기에는 무슨 뜻이 있는지 궁금해 하며 질문하면서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내 마음에 각인되었다. (하루에도 수없이 제발 ‘경청’하자고 다짐을 한다.)


‘말과글’은 기본 중의 기본인 교과목이라 함께 나누었다. 아름답고 바르게 말을 하고 글을 쓰는 일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정신과 영혼을 높은 곳까지 이끈다. 내가 겪은 일을 자유롭게 꺼낼 수 있는 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나의 말과 글이 나를 비추는 거울이 되는 건 또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 글을 쓸까 말까 두 가지 이유로 고민했다. 나도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이렇게 쓰는 게 너무 부끄러워 그렇다. 또 말이 번지르르하고 글이 그럴 듯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으냐는 이야기를 꺼내는 이들이 꼭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쓴다. 내가 모자란 인간이라 하더라도 지향志向마저 모자라서는 안 되니까.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라면 언문의 그럴싸함을 추구하는 태도를 아름답고 바른 말하기/글쓰기와 혼동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영어 번역투 문장을 함께 고치는데 각자 고친 내용을 나누면서, 문장이 깔끔하게 바뀌고 뜻이 잘 드러나는 걸 보았다. 정말 신기하고 기뻤다. 이런 경험에서 얻은 것을 붙들어 쭉 밀고 나가면, 아이들과 글을 고쳐 쓰며 놀라움을 맛본다. 과연 이 글이 내가 쓴 글인가 눈을 씻으며 보는 거다. 내 마음속 이야기가 모자람 없이, 있는 그대로 세상에 드러난 것을 보며 뿌듯한 거다.

이오덕 선생님의 글에 나눌 게 무척 많았지만 이 대목을 따왔다.



“누구든지 글쓰기 수련을 하는 길에서 어떤 문체가 있는가, 그 문체들 가운데서 어떤 문체가 자기한테 알맞은가 하여 그것을 본받거나 어떤 틀에 맞추듯이 글을 쓰는 것은 어리석고 부질없는 일이다. 다만 자기가 쓰고 싶은 절실한 생각이나 이야기를 자기 말로 아무 형식에도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쓰게 되었을 때 그 결과가 저절로 어떤 글의 맵시를 갖추게 된다면 그때는 그것을 가지고 문체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또 말하지만 아직도 우리는 개성이 담긴 문체를 말할 단계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밖에서 들어온 남의 나라 말과 말법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일이 가장 크고 급하다. 그리고 잃어버린 우리 말과 짓밟혀 있는 우리 말을 도로 찾아내고 주워올려 글에서 살려서 써야 제대로 우리 글이 된다. 이런 노력을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있는 힘을 다 기울여 했을 때 비로소 우리 글의 문체란 것이 생겨나고, 사람마다 빛나는 개성이 담긴 글이 나타날 것이다.”


-『우리 문장 쓰기』 가운데


“자기가 쓰고(어쩌면 말하고) 싶은 절실한 생각이나 이야기를 자기 말로 아무 형식에도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쓰게(말하게) 된다.”고 한다. 문장이 곧 글로, 삶으로 이어진다. 그러니 글쓰기를 ‘글쓰기 수련’이라고까지 부를 만하다. (비단 글쓰기뿐이랴. 무엇이든 최고의 경지에까지 다다르고자 노력한다면, 그 바탕에 사랑과 연민이 있다면 그건 모두 ‘수련’이다.)


『녹색평론』에서는 두 꼭지를 함께 나누었다.
<돈의 신화를 벗긴다>는 몇 년 전 교사공부모임에서 봤던 자료이고, <농을 살리는 세계로-‘자유협동주의’의 이념>은 우리 학교 텃밭수업을 큰 맥락에서 바라볼 때 도움이 될 듯해 골랐다.
난 이념이나 의미를 초등 시기의 아이들에게 바로 들이대는 것이 조심스럽다. 아이들이 어떤 활동에서 꼭 무언가 깨닫고 얻는 게 있어야 한다고 보지 않는다. 그건 누가 제시해서 얻는 게 아니라고 보기 때문에. 하지만 교사가 교육활동의 근간이 되는 배경과 사상을 잘 이해하고 굳건히 하면, 아이들에게 기분 좋게 스며들 것이라고 믿는다.
(누군가 그랬지. 당신이 마당을 깨끗이 쓰는 게 무슨 소용이 있냐고. 그러니 이렇게 대답했다지. “나는 지구의 한 귀퉁이를 쓸고 있습니다.” 똑같이 마당을 쓸지라도 그 배경에 무엇이 있느냐에 따라 다른 파장의 행위가 되는 것이다.)


훌륭한 선생님들이 쓴 자료만큼이나 귀했던 게 있다. 그루터기선생님이 ‘평화의 징’을 보며 정리한 고민과, 해님선생님이 아이들 성장의 관점에서 문집을 읽은 대목이었다. ‘평화의 징’이 평화적으로 적용되고 있는지 사례를 들어가며 물을 때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덕분에 내 고민을 좀더 밀고 나갈 수 있었고, 4학년 아이들과 2학기에 시도할 만한 것도 상상해보았다. 문집을 보며 아이들의 변화를 발견하는 해님 선생님 모습에서 아이들의 삶을 오래, 길게 바라보고픈 소망이 다시 한 번 일었다. 문집을 잘 만들어야겠다는 사명감도 들었고^^


난 이곳이 취하기 참 좋은 곳이라 느낀다. 아이들의 사랑에, 부모님들의 격려에, 동료의 열심에. 내가 적당히 해도 타인들의 힘으로 어찌어찌 살아갈 수 있는 곳. 그래서 퍼질러지고자 하면 마냥 그럴 수도 있는 곳. 그러면서도 내가 괜찮은 인간이라고 믿게 되는 곳. 해님선생님은 업무능력이 뛰어나고 눈이 밝다. 그루터기 선생님은 아이들과 함께 하는 교육활동의 참뜻이 무엇일지 곰곰 생각하며 실행에 옮긴다. 두 사람이 적절한 때에 왔고, 꼭 필요한 자리에 있다. 학교뿐만 아니라 요즘의 나에게도 여러 면에서 깨달음을 주는 분들이다.

두 분은 모를 거다. 방학 때 공부했던 것을 틈틈 돌아보고 있는데, 주섬주섬 떠든 내 입이 얼마나 부끄러운지.
그래서 앞으로 다시는 이와 같은 자리를 마련할 마음이 없다!
인류가 진화하고 있다는 내 믿음에 걸맞게 뛰어난 사람들이 계속 들어오고 있어서, 정말이지 나만 잘하면 다 되는 것이었다^^

방학 직후와 개학 직전, 황금연휴 시간을 내준 사려 깊은 두 분께 다시 한 번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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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8-29 20:45
    세 분 선생님의 글 보면서 마음이 흐뭇해요. 서로 아껴 주시는 모습이 보기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