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수후기] 발도르프 학교교사 양성과정을 시작하며

작성자
가야
작성일
2016-08-20 16:51
조회
1832
위기는 2015년 무렵 왔던 듯합니다. 아이들이 달랐습니다. 그게 정확히 무언지는 딱 잘라 말할 수 없으나 분명 전과는 다른 '새로운'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오랜' 사람이었고 내 수업방법이나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는 낡았습니다. 그럼에도 부모님들의 신뢰와 아이들의 애정으로, '신비한 힘'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도리가 없는 이끌림으로 잘 지나왔습니다.

'이곳의 교사로서 난 끝이다.' 올해 이런 생각을 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새로운 아이들을 바라보는 내 시선이 더이상 쓸모없다는 판단이었습니다. 여전히 아이들을 사랑하고, 애정어린 조언을 건넬 줄 알며, 아이의 현재에 필요한 게 무언지 희미하게 감지하지만, 그간의 운에 기대어 제자리에서 맴돌았을 뿐이라고 느꼈습니다.

사람은 자신을 구할 방법을 늘 찾는 법이고 또 찾게 되는 법이라 이 교육 저 연수 더듬거리다 슈타이너를 좀 자세히 만났습니다. 인류의 고향이자 기원이라 믿는 '별'이 좋아 천문학 언저리를 오래 기웃거렸는데 우연처럼 인연처럼 발도르프 교육과 접점을 발견했어요. 그게 몇 년 전의 일입니다. (우리 학교는 좋은 것들을 끊임없이 전해주는 곳이라, 발도르프교육을 조금이나마 짐작한 건 2009년 교사연수 '특수교육'을 통해서였지요. 몇 년 전, 교사회 전달연수 때 봄날 선생님이 슈타이너의 생애와 발도르프학교의 수업이 요약된 글을 전해주었고요.)

그러나 발도르프교육은 지나치게 서구적인 듯하고, 예술수업 방법론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처럼 느껴져 도무지 친해질 수가 없었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랬습니다. 십인십색. 우리 문화와 상황에 맞는 교육법이 있을 텐데 굳이 슈타이너를 좇을 필요가 있을까 싶었습니다. 선뜻 손내밀 수가 없었지요.

아이들을 만나면 이런 의문이 떠오릅니다.

'사람은 어떤 원리로 자라는 걸까? 아이들 내면의 변화가 느껴지는데, 그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는 왜 이렇게 만났을까?'

그러다가 한 존재를 더 깊게 이해하고 싶고 아이의 본질에 닿고 싶어 갈망합니다. 올해 더욱 그랬습니다. 우리반 아이들을 만나며 한 아이 지성의 발달과 감성의 결, 이 세상에 등장한 까닭까지 총체적으로 파악하고픈 고단한 열망에 시달리게 되었지요. 언젠가 학교를 떠나게 되더라도 지금 내 앞의 아이를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고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이런 상태였으니 가만히 있지 말고 뭐라도 해야 했지요. 올해는 천문연수 대신 발도르프 연수를 택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연수를 작심하고 시작했습니다. 연수를 들으며 내 안에 걸림이 있다거나 여타의 이유를 대며 중간에 작파하지 않기. 교육신청서를 쓰며 센터에도 당부했지요. 제가 중간에 그만 두려고 하거든 붙들어달라고. 매회 100만원 가까이 되는 연수비가 부담이 되고, 이걸 일 년에 2회씩 4년간 이어가야 하는 것도 막막했어요. 그래도 길은 어찌어찌 열릴 테니까, 이 또한 궁극으로 가는 길목 어디쯤일 테니까 하며 그냥 시작해버렸습니다. (5월에 '지구학' 강좌를 들으며 느낀 생동감이 어른거리기도 했고요.)

연수내용을 정리할 계제가 못 됩니다, 아직은. (3학년 안나어머님께서 『교사를 위한 인간학』이라는  책을 소개해주셔서 읽었는데, 그 책에 이번 연수 내용이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정리와 체계화 능력이 탁월한 이들이여, 복되도다! 좋은 책을 소개해주신 분께도 고마움을!)

다행히 지금까지 살아오며 아무렇게나 맴돌던 것들이 슈타이너 사상을 이해하는 데 꽤 적절한 디딤돌인 건 분명했습니다. 크리슈나무르티, 파우스트, 농사, 별, 시, 융... 연수내용과 닮은 부분이 꽤 많았습니다. 전 가만히 앉아서 동서고금의 지혜를 날로 받아먹는 기분이 들었고, 슈타이너 사상(발도르프 교육)에 대한 모든 비판도 이해되었습니다. 이건... 학문과 예술, 종교의 총화였어요! 독일에서 오신 선생님께서 인지학은 신화, 예술, 종교의 접근법을 통합한 것이라고 설명했는데 왜 그런지 어설프게나마 느꼈어요. 그리고 좀 뜬금없지만 "꿈은 개인의 신화, 신화는 집단의 꿈"이라고 했던 조셉 캠벨이 내내 떠올랐어요. (조셉 캠벨을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인지학도 흥미로울 듯^^)

이번 교육에서 제게 깊게 스민 내용은 성장과정에서 나타나는 '불협화음의 시기'였어요. 들숨과 날숨, 오르막과 내리막, 빛과 어둠... 인생에서 서로 짝을 이루는 게 공존하는 건 당연하지요. 조화를 향해 각자의 리듬과 템포에 따라 자라는 아이들에게도 어딘가 삐걱대는 부조화가 있을 테고요. '불협화음의 시기'를 들으며 몇몇 아이들이 떠올랐고 이 아이들이 참 잘 크고 있구나 안심했습니다. 아이들의 불안과 두려움, 미세하게 감지되는 내면의 균열, 관계의 불안정함이 모두 다음 성장을 위한 전조前兆인 것이지요. 그런데 오직 명랑사회 구현만을 위해 이 땅에 온 듯한 아이들, 타고난 밝음과 천진난만으로 무장한 어린이들에게서, 빛이 꺼져버린 듯한 시기를 목격할 때 교사는 덩달아 어두워집니다. 아이들이 늘 행복감에 사로잡혀 있기를 원하는 나의 기대, 내가 담임인 동안 만큼은 '조화'의 상태이기를 바라는 나의 욕심도 목격했어요. (아이들이 빛나는 때만 경험하는 교사는, 교사로서 참 불행한 겁니다!)

수업시간에 집중하지 못하고 친구들과 떠드는 아이가 있다고 해봅시다. 이렇게 가정할 것도 없이 그런 아이는 늘 존재하지요! '아이가 수업시간에 집중하지 못한다'는 관찰과 함께 원인을 파악하고 개선책을 모색하는 일도 당연히 뒤따릅니다. 혹시 내가 교사로서 부족해서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건 아닌가 하는 자기의심도 올라오고요. 이런저런 시도가 실패했다고 느껴지면 살짝 우울하지요. (수업시간에 아이들이 떠드는 정도로 절망하지는 않습니다. 이건 예시일 뿐이에요^^)

교사의 시도는 시도대로 의미있고, 아이들의 천방지축은 그것대로 의미있는 겁니다. 내가 지금 만나는 아이들이 얼마나 잘 자라고 있는지 교육내용과 사례나눔을 통해 확인했고, 나의 시선과 판단 역시 건강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우리가 함께 갈 길이 참 멀다는 것도 새삼 깨달았고요.

이레의 연수 동안 좋은 노래를 만나고 오이리트미라는 동작예술을 맛본 것도 큰 기쁨이었어요. 아이들과 해볼 만한 놀이를 배운 것도 좋았고요.

발도르프 연수에서 인상적인 건, 연세 지긋한 선생님들이 오셔서 지혜를 전해주는 모습입니다. 그렇게 나이 많은 분들이 아직까지 활동하는 게 참 고맙고, 한 사람의 성장과 더 나은 사회를 향한 분투에 긴 시간 함께 하는 마음이 감동적입니다.

평생을 공부해도 인간은 늘 수수께끼라는 선생님들의 태도. 사람을 결정론적 시각으로 보지 않는 열린 마음.

그런 이들이 계신 자리에 나를 데려다 놓는 것으로도 충분하겠지요.

연수의 힘으로 이번 2학기도 기쁘게 엽니다^^
전체 1

  • 2016-08-25 18:46
    힘찬 후기를 보니 기쁘고 행복합니다. 힘겨워 하는 마음에 저도 덩달아 좌절했었는데 얼른 힘내야겠어요.
    저는 <교사를 위한 인간학>에 밑줄을 긋고 요약정리를 아무리 해도 모르겠는 것이 너무 많답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