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을 줍다

작성자
가야
작성일
2016-10-21 20:41
조회
1699
우리반이 되면 은행을 주워야만 한다는 걸 알고 있던 몇몇 아이들은 은행나무에 잎이 돋기 전부터 괴로워하였다. 더럽고 냄새나는 걸 왜 우리가 줍느냐고 저 나무를 베어버려야겠다고 궂은 농담을 하는 아이도 있었다. 일하는 수고로움이 부정적 반응으로 드러나면 나는 잠시 휘청한다. 예전 아이들과 비교하는 마음도 든다. ‘작년 2학년들은 이것보다 더 힘든 일도 했는데... 4학년이나 되었으면서 투정이 심한 것 같다.’

그래도 일하는 기쁨을 표현하는 아이들의 기운이 옆사람에게 전해지겠지 믿으며 서너 번 더 주웠다. 장터에 내다팔고 학교앞에서 팔아 여행비를 벌었고, 이번 여행에 가져가 저녁마다 구운 은행을 간식으로 먹었다. 그 가운데 어떤 아이는 은행맛을 알아버렸고, 우리가 직접 주워서 이렇게 해먹으니 좋다는 이야기를 하는 아이도 더러 나타났다.

변화는 이렇게도 찾아오더라.
노란 은행알이 오렌지 축소모형으로 보인다!
냄새를 계속 맡다보니 이젠 괜찮다!
심지어는 앉아서 학년회의를 하느니 밖에 나가 은행을 줍자고 말하는 아이까지!

길바닥에 은행이 쫙 깔린 날이었다. 달라진 아이들 힘을 믿고 물었다.
“은행 밟으면 냄새 난다고 피하는 사람은 많은데 저걸 줍는 사람이 없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가 주울게요!” 하고 대답했다.

이런 그림이면 학교의 신비한 힘과 교육의 아름다움을 믿었겠지.
우리의 아이들은 촌철살인의 말을 날려 날 민망하게 하였다.
“또 우리가 주우란 뜻이네요. 으으으...”

그렇게 억지로(?) 은행을 줍는데 6학년 제주도여행 마치고 하루 쉬는 날 학교에 나온 태경이와 재서가 왔다. 둘은 4학년들을 어떻게 세뇌시켰기에 이런 일을 열심히 하냐며 기꺼이도 일을 거들었다. 냄새나는 노동에 서서히 지칠 무렵, 두 오라비의 등장은 동생들 마음을 몹시도 흔들었나 보다. 큰 키 태경이가 자전거 거치대 지붕을 툭 쳐서 은행알이 후두둑 떨어지면 남자아이들이 와르르 모여 줍기 바빴다. 두 오빠들이 대야 가까이에 앉아 부엌에서 빌린 비닐장갑을 끼고 노랗고 물컹거리는 은행껍질을 벗기니 둘러앉은 여자아이들 목소리가 막 커지면서 희희낙락 웃음꽃이 핀다.

마침내 우리 다니는 길이 말끔해질 정도로, 은행을 큰 대야가 절반이나 찰 정도로 다 주웠다.

역시 교육에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 저 두 형과 오빠 같은 잘생긴 사랑말이다^^


★ 일하는 어린이
전체 5

  • 2016-10-22 08:19
    부정적인 아이들의 분위기를 순식간에 긍정적인 것으로 바꾸어주는 사람은 열에 아홉은 교사가 아니라 어디선가 혜성처럼 나타난 또래이거나 한두살 위의 언니 오빠인 점이
    음으로 양으로 애를 쓰던 교사의 처지를 초라하게 만들지만...

    그래도 자유학교에서는 지금 내 앞에서 투덜거리던 어린이들이 멋진 언니.오빠로 자라나 훗날 투덜거리는 동생들의 분위기를 싹 바꿔줄 것이라는 희망이 있으니!

    선생님들의 애씀이 아이들 마음 속 어딘가에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을 거예요^^

  • 2016-10-22 09:08
    10월 4일 월요일 아침, 이르게 출근하여 은행작업을 시작하던 가야선생님 눈에 등교하는 용민이가 보였어요.
    " 용민아, 어서 와라. 잘됐다!!"
    " 안돼요. 나 오늘 내가 제일 아끼는 셔츠 입었단 말이예요.~~~~"
    산에 오르는 내내 두 분의 선문답이 가슴을 맴돌더군요.
    그 날 용민군은 일을 했을까요?
    글을 읽다보면 나도 그들과 더불어 떠들며 은행까고 싶습니다.

    • 2016-10-22 09:13
      와~~
      어록에 남을만한 문답이네요^^

  • 2016-10-22 15:16
    저 일하는 어린이... 뭐랄까 ..달관한 모습이... 인상적이네요

  • 2016-10-28 17:15
    진짜로 선문답! ㅋ
    시현이는 이제 은행이 맛있다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