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백일장

작성자
가야
작성일
2017-05-23 20:25
조회
1634
4월 백일장

지난 4월 1,2학년이 함께 생생공화국에 갔다.
교사들의 취지는 백일장이었으나 아이들의 모토는 “한 번 태어난 인생, 실컷 놀자”였다.
아이들 노는 모습을 보면 뿌듯하고 흐뭇해 흥을 깨뜨리고 싶지 않지만
교사의 임무가 머릿속에 스치며 뭐라도 해야(엄밀히 말하면 뭐든 시켜야) 교사 노릇을 한 것 같은 부담이 살짝 든다.
그래서 인디언텐트를 뛰어다니며 생쥐와 고양이 놀이니 텐트 지키기 놀이 같은 것에 취해 있는 아이들의 흥을 무지막지하게 깨뜨리고 시를 쓰라 시킨다.

백일장白日場!
문자 그대로의 뜻에 너무 충실한 나는, 시 안 쓰고 좀 놀면 어떨까 넌지시 말 꺼내는 다른 교사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고, 며느리 쪼이는 봄볕 아래에 애들 앉히고 시어머니처럼 시를 쓰게 한다.
놀다 만 기분으로 무슨 글을 쓸까 싶은데, 다들 깜냥깜냥 시를 쓴다.
어떤 아이는 일필휘지로 쓰지만 누군가는 창작의 고통을 온몸으로 표현한다.

가르친 게 없는데 무언가를 써낸 1학년 아이들을 격려하고 싶고 실제로 잘 쓰기도 하여서
이슬 선생님과 의논해 시상식을 하기로 했다.
우리들끼리 소박하게 꾸리는 행사였다.
한 아이가 시상식을 “어디에서” 하는지 묻는다.
식이란 식은 아래층인 둥지층에서 치렀는데 “1학년 교실”이라 답하려니 좀 미안하다.
그래서 상을 전달하는 사람으로 대표교사와 행정교사와 잘생긴 졸업생들을 모셨다.
폼나게 상 받는 기분을 누리라고.

 

 

시상식을 하기 전, 이슬 선생님이 아이들이 쓴 시를 읽는다.
아이들 얼굴에 수줍은 자랑스러움이 가득하다.
얼굴이 빨개지며 키득키득 웃는 아이, 선생님 곁에 꼭 붙어서 해해거리는 아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지만 귀가 쫑긋해지는 게 눈에 보이는 아이...
아이들은 첫 줄만 들어도 그 시를 누가 썼는지 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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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몇 편을 보자.

자기가 겪은 일을 줄글로 풀어서 쓴 아이의 시이다.
형아랑 놀았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썼다.
시에 등장하는 형의 여동생이 우리반인데 오빠 이름이 나오자마자 아주 좋아했다.




동균이형

동균이형아랑 놀았다.
태권도놀이 했다.
생쥐와 고양이 놀이도 했다.
동균이형은 힘세다.
하지만 내가 형을 돌리니깐
으아 하면서 넘어진다.
내가 힘이 조금 더 센 거 같다.
형이 같이 놀아주니까 참 좋다.
-준영 올림






솔직한 내용과 함께 눈에 들어온 건 ‘올림’이라는 말이었다.
이 시를 쓴 아이는 자기가 쓴 대부분의 글에 제 이름을 쓰고는 ‘올림’을 붙이는 습관이 있다.
난 그게 꽤 마음에 든다. 평소에 엉뚱한 언행으로 좌중을 웃기며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이 아이와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겸손’이, ‘준영스럽게’ 두 글자로 구현되는 듯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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돗자리

서현이가 돗자리를 날려서 화가 났다.
윤솔이가 웃었다.
윤솔이가 웃어서 모두 웃었다.
그래서 자리를 옮겼다.
-최린





먼먼 타인에게는 별 감흥이 없을지 모르지만 그 장면을 기억하는 아이들은 모두가 웃는다.
화가 났다고 한 아이도, 함께 웃은 친구도, 실수로 돗자리 날리게 한 아이도.
1학년 아이가 이런 글을 쓴다면 무조건 격려한다.
꾸준히 자기 삶을 적어나가면 아이의 글이 점점 풍성해지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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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처음에 학교로 갔다.
그다음에 버스를 탔다.
정류장에 내리고 놀러갔다.
놀고 나서 시를 썼다.
그다음에는 어떻게 될까.
-박서형





지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간략하게 쓴다.
그다음에는 내가 현재 하고 있는 행동조차도 과거시제로 기술한다.
지금 시를 쓰면서 “시를 썼다”라고 쓴다.
저학년 아이들 글에서 자주 발견되는 표현이라 반갑다.
서둘러 마무리하고픈 아이의 마음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다음에는 어떻게 되었냐면,
한 가지만 콕 집어서 또 써보자고 했다.
그랬더니 해맑게 웃으며 이렇게 썼다.





개미

저기 땅에서 개미를 잡았어요
엄청 컸어요
나무 위에 올려줬더니
조금 올라가다가

떨어졌어요
바둥바둥하다가
일어났어요
내가 가려고 했더니
개미가 따라왔어요.






어디를 가더라도 개미를 찾는 이 아이는
바로 눈앞에 있는 개미와 장난을 좀 치더니 이렇게 쓴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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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말을 듣다가 저걸 글로 옮기면 멋진 시가 되겠다는 욕심이 솟구칠 때가 있다.
남 읽으라고 쓰는 건 아니나 이왕이면 누가 읽어도 마음에 남는 무엇을 이끌어내려다
아이들 진을 빼기도 한다.

그러나 아직은 1학년, 편안하게 마음껏 쓰라고 격려해도 되는 때.
몸으로는 다 표현할 수 있는데 글쓰기는 아직 어렵다는 아이들의 입말을 옮긴다.



나무아이

나무 봤고
아이 봤어요
불같이 생긴 나무였어요
아이들이 나무 옆으로 지나갔어요
-손주원







쑥을 뽑았어요
뿌리가 나왔어요
잘 익었어요
냄새가 좋으니까요
-이지호
전체 2

  • 2017-05-28 18:01
    아이들 시는 어쩜 이렇게 반짝반짝할까요? 항상 아이들 시 하루 이야기를 읽으면 더 보여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건.. 저 뿐일까요? ^^ 이야기 한 자리 더 듣고 싶어하는 아이들 처럼.. ^^

  • 2017-06-01 08:42
    저도 그래요! 이야기 한 자리 더 듣고 싶어하는 아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