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생모임을 마치고

작성자
가야
작성일
2017-02-12 04:53
조회
1742
엊그제 학교돌보기 뒤에 졸업생모임이 있었어요.
모두 25명이나 왔어요. 제가 연락 돌리는 일이 부실했는데 기수들끼리 어찌어찌 소식을 전하며 잘 챙겼나봐요.
교회수련회로 어쩔 수 없이 못 온 친구 한 명을 빼놓고 모두가 참석한 높은 출석률의 기수도 있었네요.

훤칠하게 빛나는 얼굴, 쭉쭉 뻗은 팔다리, 생동감 넘치는 몸짓을 보고 있으니 그야말로 생명력이 느껴졌어요.
우리가 얼마나 많은 복을 지었기에 이렇게 눈이 호강하는 걸까요!
이 호사를 우리끼리 누려도 좋은 걸까요!
게다가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의 조합을 뛰어넘은, 개체의 힘이란 얼마나 위대한가요!
이 아버님과 이 어머님이 만나 이룬 자식이 저 아이가 맞는가 싶을 정도로 놀랍네요.
인류는 역시 진화하고 있는 게 맞아요. 더 나은 방향으로^^


와! 약속시간을 어찌나 잘 지키던지, 계획대로 2시부터 모임을 열었어요.
훨씬 전부터 와서 교사회의가 끝나길 기다리는 아이들도 있었지요.

교사회가 야심차게 품격있는 간식을 준비했는데 식욕왕성한 청소년들인지라 순식간에 동이 났어요.
흘린 것도 3초 이내에 주워 잘 먹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어요.
애들 뭐라도 하나 더 먹여서 보내고 싶은 마음들이 모여 어떤 선생님이 서둘러 나가서 간식을 사왔지요.
초등 시절 기억하라고 고가의 유기농으로!
그 역시 게눈 감추듯 먹었으니 다음엔 반드시 물량공세를 해야겠어요.


다함께 즐거운 몸놀이를 하고, 모둠별로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주제는 "초등시기에 필요한 성교육과 진로교육"
갑자기 학술대회 냄새가 나는 듯해 아이들은 살짝 당황스러워 보였으나
교사회의 취지를 잘 헤아린 눈치 백 단, 우리의 졸업생들은 본인들의 성과 진로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끊는 게 아쉬울 만큼 오래오래 이야기를 나눈 모둠도 있었고요.
사적 대화와 공적 담화를 잘 구별하는 아이들인지라 발표를 할 때는 본디 주제로 돌아왔지요.
학교탐방, 진로수업에 대해 여러 제언이 있었고 성교육을 이렇게 하면 낫겠다는 조언도 해주었지요.

아이들 이야기 가운데 초등 시절에 무슨 성교육을 받았는지 기억이 안 난다는 말이 가장 반가웠어요.
(아이들 말을 들으며 '공들여 수업해도 소용없구나' 이럴 교사는 한 명도 없을 거예요!)

저는 졸업생들이 수업시간에 배운 것을 잘 기억하기보다 이곳 초등시절을 아름다운 풍경화처럼 간직하기를 바라거든요.
그러니까 분위기나 느낌으로, 색깔이나 맛이나 소리로, 하나의 장면으로.
학교살이를 하다가 아이들과 춤추며 놀았던 흥겨움,
겨울날 걸레 빨며 손등이 터질 듯했던 차가움,
게임 안 돼 피시방 안 돼 안 되는 게 많았지만 기어이 하고야 말았던 작은 모험심,
폭우를 피해 들어간 화장실에서 맛본 삼겹살맛,
지리산에서 바라본 장엄한 일출의 붉은빛,
어깨가 뽀사질 것 같고 발바닥이 타는 듯했던 고단함 뒤의 휴식... 뭐 이런 것들로.
교육내용은 아이들 존재속으로 이미 다 스며들어 까맣게 잊어버리면 좋겠다는 욕심이지요^^

나는 초등 시절에 야동을 보았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어떤 목소리에
아이들이 무슨 잘못을 하든 그 상황에 충실하게 대처하되
모두 잘 자라리라는 믿음을 잃지 않고 대하는 게
우리 모두에게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느꼈어요.

교사회가 아이들에게 편지봉투를 돌렸는데
빳빳하고 두툼한 봉투를 만지더니 "뭐 이런 걸 다..." 하고 말하던 친구가 있었지요.
아이구 세상에! 이제 그런 말도 하는 나이이군요.
그 곁에서 "문상인가 봐" 하던 아이도 있었어요. (문상-문화상품권)
'아이들이 뭘 기대한 걸까?' 화들짝 놀라서 부디 집에 가서 열어보라고 신신당부를!


이번 졸업생모임에 오면 아이 한 명 한 명에게 뭔가 특별한 게 있을 듯한 말로 아이들을 낚았는데
다음에는 그런 술수는 안 써야겠어요.
아이들은 그런 얕은 꾀가 아니어도 한결같이 넘치는 애정으로 이곳에 오니까요^^


참! 1기 졸업생 은솔이와 부모님께서 소식 전해주셨어요.
얼굴 뵙고 행사 준비 도와야 하는데 못 가서 죄송하다고.
선생님들, 아이들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라고요.

이렇게 따뜻한 이들 덕에 우리 학교가 이만큼 컸고, 아이들도 잘 자라고 있는 거겠지요^^


언제나 그냥 보내기가 너무 아쉽네요.
졸업생이 점점 많아지는 언젠가엔
1박2일 멀리 떠나 밤새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회포도 풀고
선후배 넘나들며 하트하트 넘실넘실 정분나기도 하다가
칠보산 커플 1호가 탄생해 교사회가 냉장고를 선물하는 그런 날을 또 한 번 꿈꿉니다~


졸업생 모두, 찾아와서 고마워요^^
못 오는 아쉬움 담아 마음 보내준 이들에게도!
전체 2

  • 2017-02-12 21:41
    기쁘게 졸업생들이 모이는 거.. 그게 우리 학교의 힘인것 같아요.
    졸업식에서.. 우리 학교가 얼마나 좋은 학교인지는 졸업해봐야 안다고 했던 서윤엄마의 말... 백프로 공감되었어요. 졸업생들 보면 내 아이 아니어도 어찌나 뿌듯한지... ^^

  • 2017-02-14 19:50
    봉투에 뭐 있었을까....너무 궁금해요. 잘 먹는 우리 아이들, 더 잘 먹고 가게 하고 싶네요. 내년 모임에는 간식이라도 보내야겠어요. 웬지 미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