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중등교사모꼬지, 나를 발견하는 시간

작성자
가야
작성일
2017-07-27 07:47
조회
1440
초중등교사모꼬지, 나를 발견하는 시간


방학식이 끝나자마자 1박2일 모꼬지를 다녀왔다.
1년에 한 번은 초중등교사회가 함께, 또 한 번은 각 교사회가 따로 시간을 보낸다.

기획자들이 재량껏 판을 짜면 모든 교사들은 거기에 나를 내던진다.
어떤 판이 펼쳐지더라도 신나게 놀고 열심히 참여하겠다는 의지가 충만하다.

밥을 먹는 중국집에서부터 긴장감이 살짝 감돈다.
각자 앉고 싶은 자리를 고른다.
별 생각 없이 아무데나 앉는 사람,
소식/채식하는 사람을 찾아 눈알을 굴리며 아직 나오지도 않은 먹을 것을 확보하려는 사람,
혹시 앉은 대로 모둠이 구성될까 싶어 눈치를 보는 사람,
여기에 앉아야 오늘 운이 좋다 호객하는 사람,
사회생활에서는 역시 줄을 잘 서야 한다며 누구 옆에 앉은 걸 마구 자랑하는 사람.
배불리 먹기 좋아하는 나와 최원배 선생님은 미모와 아량의 수산나 선생님 의사는 묻지 않고 일단 우리 자리에 앉혔다.


진행자가 어떤 사람끼리 모둠인지 발표한다.
우리 모둠이 역대 막강이라는 듯 모둠원이 호명될 때마다 손뼉치고 환호한다.
다른 모둠의 단합을 과감하게 비방하고 우리 모둠이 역시 낫다고 과시한다.
시작부터 자만과 멸시가 난무하는 장, 이게 바로 페어플레이다!


각자 오버하며 어떤 ‘역할’을 한다.
모꼬지의 흥을 돋우려는 거다.
암묵적으로 약속한 오버라 서로 우습게 봐준다.
하하하^^



내가 투덜거리면서도 결국 좋아하게 되는 시간은 몸놀이와 뒤풀이 게임.
세월에 장사 없고 나이가 나이인지라 놀다가 지친다.
그러나 유치한 시간은 치유의 시간이기도 하다.
함께 어울리며, 한 학기 동안 내가 받았거나 남에게 주었는지도 모를 스트레스를 모두 날린다.
바닷가라면 수중 기마전, 눈 감고 달리기, 격투기스러운 축구 같은 몸놀이가 빠지지 않았을 텐데 이번에는 휴양림이라서 비교적 얌전하게 논다.
못 놀고 죽어 억울한 귀신이라도 씌었는지 다들 기를 쓴다.
하늘에서 딸기가 내려와, 전국노래자랑, 눈치게임, 배스킨라빈스31, 마피아 등이 예고도 없이 펼쳐진다.
이런 판에서는 초록샘 선생님과 수산나 선생님이 독보적이다.
게임을 할 때 가장 열정적으로 참여하고 유쾌한 실수를 남발하며 좌중을 들었다 놨다 한다.
노는 모습은 영락없는 20대라 이들이 나이를 속이고 학교에 들어왔나 의심하게 된다.



이번 모꼬지에서도 특별한 자리가 있었다.

이슬 선생님과 임은숙 선생님이 그동안 공부한 평화학 연수를 바탕으로, 한 꼭지를 맡았다.
먼저 감정카드를 골라서 한 학기 지낸 이야기를 나누었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각자의 일이 바빠서 속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놓치기도 하는데, 이런 자리 덕분에 그동안 어찌 지냈는지 자세히 듣는다.

이어서 역할극이 펼쳐진다.
윗마을, 아랫마을로 나누어 갈등상황을 제시하면, 각 마을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한시간 내에 합의를 해야 한다. 3년 전 홍수가 났던 두 마을. 잠시 후면 또 홍수가 나서 아랫마을이 잠길 상황이다. 두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할까?

최근 몇 가지 고민이 깊었는데 그 상황이 내 이야기인 듯해서 푹 빠져들었다. 그리고 내가 긴급하고 중요한 사안에 어떻게 대응하는지 패턴을 알 수 있었다. 아랫마을 사람들이 여기에 오는 게 불편하다는 첫말을 듣자마자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무력감을 느꼈다. 다른 사람이 죽게 생겼는데 나 몰라라 하고 내가 살면 무슨 의미이지. 집단의 부정적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걸 잠재우느라 중요한 일을 놓치고 있는 나를 보았다. 토론과 합의를 통한 민주주의에 회의를 느꼈고 정치인은 뭣 하러 있나 싶었다. 아랫마을 사람의 다급한 외침을 듣고도 저이가 얼마나 절박했으면 저리 행동할까 생각하지도 못했다. 우리가 맡은 역할 중에 실성한 사람이 있는가보다 여기고 우리는 합의를 마저 하자며 못 들은 척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은 조급해지고, 이렇게 살아가느니 차라리 물에 빠져 죽어야겠다는 마음이 들 무렵 상황이 종료되었다는 종이 울렸다. 난 대체 뭘 한 거야, 국회의원이면서.

“우리는 홍수가 나서 다 죽게 생겼는데 윗마을 사람들이 차분하게 회의를 하는 모습에 분노했다.”는 이야기가 가슴에 콕 박혔다.
“왜 우리 마을에 와보지 않았냐?”는 질문에 부끄럽기도 했다.


다들 맡은 역할을 나름껏 해석하고 그 캐릭터를 살리기 위해 실감나게 연기를 한 덕분에 몰입할 수 있었다. 짧은 역할극이었지만 내겐 그걸로 그치지 않았다. 그 시간은 내 양심을 건드렸고, 내가 지금 무얼 해야 하는지 깨닫게 했다. 귀담아듣기는 해야 하나 다급한 상황에서는 우선시하지 않아도 될 목소리나 입장을 헤아리느라 꼼짝도 못했던 내가 너무 어리석었다. 물에 빠져 죽으나 배 터져 죽으나 늙어죽으나 사람은 언젠가 죽게 마련이지만, 생의 매순간이 영원한 것처럼 살고 싶다. 남이 집착으로 보든 말든.


다음날엔 초록샘이 골라온 그림책 <어느 날 아침>을 함께 읽었다.
같은 그림을 보더라도 사람마다 읽어내는 의미가 다양하고, 생각과 느낌을 "짧게" 꺼내주니 모두에게 풍성한 시간이다.
(역시 말은 짧아야 귀에 쏙쏙 박힌다^^)
어느 날 아침, 화려한 뿔 반쪽을 잃어버린 사슴이 뿔을 찾아 집을 나선다. 사슴은 여행길에서 여러 동물을 만나고 달님을 만나며 자기만의 깨달음을 얻는다. 그런데 남은 뿔도 그만 떨어져버린다!
작가는 사슴의 여정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며 뿔이 없는 사슴을 아름답다고 말한다. 그리고 뿔 떨어진 사슴의 머리에 막 돋아난 뿔을 그려 넣었다.

고심 끝에 어렵게 골랐다는 그림책. 마치 내 마음을 어루만지려고 가져온 듯한 맞춤.
그 사슴이 옆사람을 상징하는 것 같았고, 내게 벌어진 온갖 일인 듯했다. 누군가의 여정이 아름답다면, 그 누군가가 상실에 절망해서 갇혀 있지 않고 몸을 움직여 길을 나서고 길 위에서 도움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위로하는 순간들이 있어서 그렇다. 작가가 사슴에게 돋아나는 뿔을 선사했듯, 우리가 타인에게서 돋아나는 싹을 읽을 수 있다면 바로 내 삶이 조금은 달라질 것이다. 세상은 우리가 읽은 대로 본 대로 펼쳐지기도 하니까.
평소에 말 잘하는 우리 교사들이 그림책 시간에는 주절주절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말을 아꼈다.
말과 말 사이에 길게 느껴진 침묵.
침묵을 말로 채우지 않는 그 마음들을 충분히 알 것 같았다.
고요함은 결코 간밤의 피로 탓이 아닐 거라 믿는다^^


그리고 다 옮기지 않은 이야기는, 두고두고 꺼낼 우리의 안줏감으로.

학기마다 새로운 얼굴의 모꼬지를 펼치는 두 교사회의 상상력에 감탄하고,
방청객 알바 싹쓸이해도 될 듯한 교사들의 참여와 호응을 찬탄하며~
전체 2

  • 2017-09-01 10:46
    하하..가야선생님 글을 읽으면.. 무거운듯 가벼운듯..^^*
    사진이 필요해요. 선생님들의 환호와 망가짐(^^) 불꽃같은 모습을 보고싶어요~~

  • 2017-09-10 08:49
    선생님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