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여행계획 발표회

작성자
가야
작성일
2017-07-09 14:15
조회
1516
중학교 3학년 여행계획발표회에 다녀왔다. 바로 옆 학교이지만 각자 삶이 바빠서 서로의 행사 같은 건 거의 참여하지도 못하는데 어쩌다 시간이 맞았다. (한 건물에 있지만 다른 학년 교사와 말 한 마디 못 나누고 지낼 때도 있다.)

우리 5,6학년도 다녀왔다시피 대안학교에서 제주 여행은 이미 보편적인 프로그램으로 자리매김했다. 제주에 가면 다른 대안학교 학생들을 마주칠 정도이다. 그런데 또 제주라니! 제주는 그만큼 매력적이고 이야깃거리가 무궁무진한 곳이다. 독특한 지질, 아름다운 자연, 현대와 긴밀한 아픈 역사, 중세국어의 흔적이 남아 있는 말투, 효리와 상순까지.

아이들이 떨리는 목소리로 자기들이 짠 계획을 발표한다.
익숙한 이야기였고 굳이 저런 내용까지 말하지 않아도 좋겠다 싶은 대목도 있었다. 그러나 듣는 내내 가슴이 쿵쿵거리고 눈물이 찔끔 났다. 아이들 이야기를 듣다가, 모든 게, 전부 다, 저 여행계획이 통째로 이해되어버렸다.

매사 마냥 우호적이지 않은, 비판과 평가의 달인들 앞에서 아이들이 발표한다. 그날 참여한 청중들 모두 그랬다는 건 아니고, 치열한 현장에서 오래 살다 보면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예리해지는 면이 있는데, 그곳엔 나름 열심히 오래 산 사람들이 많았고 질문 역시 어떤 경향성을 띠고 있었다.

아이들이 문득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4학년들의 자전거 일주를 뛰어넘는 여행이 무엇일지 고민했다고.
작년 그 여행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전해 들어 안다. 선배가 전무후무한 족적을 남기고 그게 두고두고 전설이 될 때 후배의 부담감은 엄청나다. 내가 아무리 기를 써도 저걸 뛰어넘을 수 없다는 걸 알 때 좌절감도 크다. 아이들의 말을 듣다가 꼭 전하고픈 이야기가 있었는데, 아이들 표정을 보니 말하다가 내가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그 자리에선 차마 하지 못했다.

아이들이 주도하는 여행에서 교사의 역할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자꾸만 떠올랐고, 저 아이들이라면 지금까지 했던 것과 차별되는 여행을 기획하리라 기대했다. 그러다 교사회에 던져야 할 질문을 기어이 아이들에게 하고야 말았다. 이놈의 방정맞은 입을 후회했으나 이미 말은 입 밖으로 튀어나와 아이들의 귀에 들어갔다. 질문에 답하는 게 본인들의 의무라 여겼는지 난감한 표정을 지은 아이나 한숨 쉬는 아이나 각자 말을 꺼냈다.

둘은 우리 초등에서 올라갔고 둘은 다른 학교에서 진학했기에, 저 앞에 앉은 넷의 어린 시절을 모두 알지 못한다. 초등 저학년 때 오빠들에게 하도 매달려 찰거머리로 불리던 아이가, 조막손으로 요리를 멋들어지게 해서 선생님들에게 대접하던 귀염둥이가, 저리 아름다운 아가씨들로 자라서 담담하게 자기들 이야기를 풀어낸다. 다른 둘도 마찬가지이다.

아이들 이야기가 압도적으로 감동적인 건, 질문에 방어하지 않는 태도로 투명하고 꾸밈이 없는 답을 해서 그렇다. 다른 이들에게 잘 보이려 하거나 부족한 것을 감추는 답이 아니라 지금 우리는 이러이러하다는 걸 솔직하게 드러낸다. 자기들의 여건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느낌이 그대로 전해진다. 아이들 면면을 아니까 더 그렇다. 아이들에게 무거운 질문을 던진 내가 부끄러웠다.

그날 발표회 기록 일부를 함께 싣는다. 아이들 입에서 나오는 귀한 말들이 사라지는 게 아까워 뒤늦게 자판으로 옮기느라 3분의 1밖에 안 되는 기록이다. 그 3분의 1도 가슴이 벅차서 다 적지 못했다.

아이들에게 전하려던 이야기는 이것이었다.

“사람은 전설적인 타인을 뛰어넘을 때보다 어제의 자기를 뛰어넘을 때 더 위대하다.
너희들은 과거보다 훨씬 나은 사람으로 자신을 빚어가고 있다.
그러니 계획 열심히 보완하여 여행 잘 다녀와라.
올 때 초콜릿 선물 잊지 말고, 문집이 나오면 요란하게 소문내기를 바란다!“


자기 생의 절반 이상을 통째로 목도할 기회를 교사들에게 준 아이들.
그런 시공간을 교사들에게 선사하는 학교.
그러니 그라시아스 아 라 비다!



2017년 7월 6일 중등 여행계획 발표회 “일상과 결핍”

Q : 결핍을 채우기 위한 여행을 콘셉트로 잡았는데 여행을 잘 다녀오면 각자의 결핍이 충족이 되리란 기대가 있나? 여행은 일종의 일탈이고,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A : 갖다 와서 나의 결핍이 채워지기 바라기보다 우리는 결핍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기도 하는데, 우리의 결핍이 무엇인지 깨닫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결핍이 그곳에서 잠시 채워지는 것만으로도, 일상에 돌아와서 노력할 것 같다.

Q : 각자의 결핍, 일상, 새로움 등 여행 목적이 있는데 편안하게 각자가 기대하는 바와 얻고 싶은 것을 있는 그대로 자유롭게 이야기해주길.
A1 : 그런 건 없다.
A2 : 여행 가서 알고자 했던 목적만 이루면 되는 것 같다.
A3 : 특별하게 내가 결핍된 걸 해결하고 온다는 생각은 아니고, 내가 어떤 것이 결핍되어 있고 나의 일상은 어떤지 나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

Q : 강정마을은 예전에 여러 번 가보아서 일상의 흐름을 알 수 있었을 텐데 왜 제주인지. (방문할) 볍씨학교 학생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아는지. 그리고 제가 학교 다닐 때는, 귤 따기가 어려워 일할 사람 구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 여러분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귤 따기가 놀이, 환상인 듯한데. 그게 무언지 알고 있는지. OO가 동물을 좋아해서 그런지 조천 쪽 코스로 짰는데, 미로공원 쪽은 고양이가 많이 있으니 그 코스를 고려해도 좋겠다.
A : 사실 저희는 귤 따기를 모른다. 하루를 통으로 일하자는 이야기를 했다. 처음에는 성규삼춘(제주도의 지인)에게 일주일만 귤 따기를 해도 되냐고 물었는데, 그건 성인도 절대 절대 어렵다고 이야기했다.

Q : 귤을 막 따는 게 아니라 상처 안 나게 잘 해야 할 텐데.
담임교사 : 농사용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과 나눠먹으려고 하는 것이다.

Q : 그러면 농사지어 파는 귤이 아니라 따서 우리가 먹는 거란 말인가.
담임교사 : 팔기도 하는데 마을에서 나누어먹기도 한다.
A : 소문으로 듣고 사진으로 본 것에 의하면, 볍씨학교에서 아침에 일찍 일어나 요가와 달리기를 하고 밥, 빨래, 청소를 하는 건 알고 있다. 가마솥에 밥을 짓고. 그런데 일상 프로그램을 잘 모른다. 제주에 있는 학교가 연락이 안 된다고 한다. 미디어를 가까이 하지 않는 느낌이다. 와도 된다는 허락은 받았다. 학교에 정해진 프로그램이 있는 게 아니고 그날그날을 사는 것 같다.

Q : 볍씨학교에서 3일을 지내는 동안, 예상하는 문제나 어려움이 있는지, 그럴 때 우리가 어찌 해결해야겠다는 계획이 있는지. 또 여기 있는 넷 사이에서 문제가 있을 때, 잘 못 지내는 아이들이 있을 때 어떻게 도울지 사전에 그런 이야기를 충분히 해야 하지 않을까.
A : 아직 안 했다.

Q1 : 거기에 가면 여러분은 특별한 사람인데, 그들의 일상과 잘 섞일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들의 일상을 방해할지 모른다는 생각은 없는지. 잘 녹아들기엔 짧은 시간은 아닌가.
Q2 : 일상, 결핍을 다 빼고 꼭 하고 싶은 게 있는지. 저를 예로 들면, 제주 출장 갔을 때 마라도에서 짜장면 먹고 싶어서 그곳에 갔다. 가서 먹었는데 이건 아니었다. (웃음) 제주도라는 공간에서 꼭 하고 싶은 게 있다면.
A1 : 말 타기. 귤 따기.
A2 : 제주 234km를 국토종주처럼 돌고 싶은데 현실상 불가능할 것 같다. 나중에 돌아보겠다.
A3 : 저는 흑돼지랑 회도 먹고 싶고, 제주에 맛있는 게 많으니 많이 먹고 싶다.
A4 : 제주 하면 색다른 요리, 좋은 풍경이 떠오르고, 거기에서 우리반끼리 사진을 찍고 볍씨학교의 친구를 사귀면 좋겠다.

Q : 강정마을과 일상이라는 여행 콘셉트가 많이 이해되고 설득된다. 그런데 마지막 일정을 올레길로 잡았고 <선녀와 나무꾼> 등 일종의 관광지인데, 그게 여러분이 정한 콘셉트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그런 코스를 잡은 이유는.
A1 : 여행 기간 중 2박이 저희끼리 보내는 기간인데, 월정리 해변, 올레길, 테마파크 등 개인마다 가고 싶은 곳이 다양했다. 그렇게 짜면 우리의 요구가 다 충족이 되어서 넣었다. 장소에 큰 의미를 담기보다, 가서 편하게 우리들의 이야기를 꺼낼 수 있도록 이렇게 장소를 선택했다.

Q : 여러분 마음이 잘 맞는 것 같다. 서로 따뜻한 느낌이 든다. 준비하면서 힘들었던 게 있었나.
A : 초반에는 저희끼리의 힘듦보다 국내여행에 대한 부담이 있었다. 너무 멋지게 간 4학년의 국내여행에 압박을 받았다. 저희의 콘셉트를 잡고 나니 잘 풀렸다. 그때부터 마음이 잘 맞았다, 국내여행 시간만은. 그래서 이걸 준비할 때는 많이 힘들지 않았다.

Q : 돌아온 이후의 계획은.
교사 : 다큐멘터리로 만든다.
A2 : 그리고 저희가 ‘일상’이라는 주제를 이어서 글을 쓸 것이라, 우리반의 작은 문집이 나올 것이다.

Q : 4학년들은 당시의 국내여행을 해내면, 남은 3년 마무리를 스스로 해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있었다. 여러분 계획대로 여행을 잘 다녀오면, 중등 3년을 잘 마무리하겠다는 마음이 들 것 같은가. 마무리로서의 여행의 의미를 살릴 수 있을까.
A : 보통.

Q1 : 4학년들의 여행에서 압박과 부담을 느꼈던 것은, 그 여행에는 해내고 뛰어넘는 힘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제주는 우리가 해마다 가는 곳인데 이번 여행의 다른 점이 있을까.
Q2 : 여러분이 확신을 가지고 가고, 그걸 찾아서 오면 좋겠다.
Q3 : 저는 다르다. 청소년들이 계획해서 해내는 게 멋지고 이 자체가 의미 있게 다가온다. 저는 많이 응원하고 싶고, 지금 중심을 잘 잡고 풀어내리라 믿는다.
Q4 : 저희도 그건 마찬가지이나, 해마다 하는 여행과 3학년 마무리 여행의 차별점이 있으면 좋겠다는 뜻이다.
Q5 : 채우는 건 쉽고 비우는 게 어렵다. 내가 계획한 대로 모든 게 되는 게 아니므로 겪어보고 당해봐야 한다. 가서 멍 때리기도 했으면 좋겠다.

Q : 개인여행, 단체여행, 가족여행 여러 형태가 있는데 우리 학교 여행은 어떤 그림이어야 하는지.
(교사 첨언) : 우리가 손님을 모셔서 발표를 하는 것이므로, 여러분이 답을 할 때 최선을 다하면 좋겠다.
A1 : 같이 가는 여행이기 때문에, 내가 결핍된 것, 내 일상만 생각했는데. 선생님 이야기를 들어보니 나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전체를 생각해야 할 것 같다.
A2 : 저희 넷이 여행만 하면 잘 맞는다. 여행준비부터 실행까지 잘 맞아서 기대한다. 서로 챙기는 여행, 서로 주고받는 여행이다 보니까. 가족들과의 여행은 마냥 편하고 놀다온 느낌인데. 학교에서 가면 서로 노력하고, 함께 하기 위해 애쓰는 느낌이 든다.
A3 : 솔직히 별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다.
A4 : 학교 여행이 너무 힘들다.

담임교사 : 여행 첫 수업 때 이미지가 남아 있다. 표정이 굳은 채로, 4학년 선배들의 여행 이상의 여행이 무엇일까, 우리는 어떤 여행을 가야 선배들의 여행에 버금가는 여행을 할 수 있을까 그런 게 느껴졌다. 앉아서 듣다 보니 약간 울컥했다. 여행계획을 구상할 때 기쁘게 준비한 모습을 보았다. 담임이어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이후 여행계획에 볍씨학교나 강정마을과 소통하며 채워져야 할 게 있다. (아이들과 보완하겠다.)
전체 3

  • 2017-07-10 18:24
    아.. 이렇게 여행계획발표회를 하는 거였군요... 여행 준비를 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여행계획까지 발표한다는건 또 하나의 고민하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인것 같네요. 열 여섯에 이렇게 성숙한 고민을 했었나... 돌아봐도 아이들이 대견하기만 합니다. ^^

    마음이 바쁘거나 몸이 바쁘면 내가 해야할 일만 하는 것도 벅찬데,
    중학생까지 마음 써주시는 가야 선생님... 항상 고맙습니다^^

    • 2017-07-10 21:10
      앗... 혹시 오해하실 듯해서. 특별히 제가 신경쓰는 건 아니에요.

      마침 노트북 가까이에 앉아 있었고
      (이건 제 자랑입니다만) 듣고 자판으로 치는 능력이 좀 특화되어서
      대표로 글을 올렸을 뿐이에요.

      아무래도 초등 대표교사가 가장 마음을 많이 내고 있고요.
      작년 6학년 담임선생님이었던 달아 선생님이 중학교 1학년 유성미 선생님과 아이들을 두고 자주 소통해요.

      초등교사회 모두 중학교에 무슨 행사를 하는지 관심이 있고, 가능하면 많이 참석하려 애쓰고요.
      그날도 다른 교사들이 여럿 갔는데, 예정되어 있던 초중등 교육과정연구회가 중등 행사와 겹친 덕이었어요.
      다들 바쁜 가운데 교육과정연구회로 활동하기 위해 서로 시간 배려하고 마음 내고 그래서.


      글을 올리는 사람이 열심히 일하는 것처럼 보이는 착시효과를 방지하려고 덧붙입니다^^

  • 2017-07-21 22:14
    '매사 마냥 우호적이지 않은, 비판과 평가의 달인들 앞에서....' 마구 찔리는 부분이네요..
    그 날 참여하지 않아서 다행인가봐요.. ^^;;
    중등 여행 발표회 이야기를 초등 누리집에서 보니 많이많이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