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도르프 연수, 절차탁마

작성자
가야
작성일
2017-08-17 12:11
조회
1903
인지학센터의 이정희 선생님은 어떤 대목을 통역하다가 가끔 이런 말을 하며 즐겁게 웃는다.
"이건 우리끼리 하는 이야기이지, 밖에 나가서 아무에게나 말했다가는 또라이 취급받으니까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사람의 생을 아주 긴 흐름에서 바라보는 내용으로 '윤회'를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 많고, 물질세계 너머의 것도 중요하게 다룬다.
이 내용은 안전한 공간에서 나누고 싶으니 후기에서는 생략하겠다.

이번 연수 주제는 동물학과 역사학, 인간발달론이다.
인지학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아무리 읽어도 공허하게 들릴 것이다.
그런데 우리 학교에 입학하기 전 발도르프 교육기관에 아이들을 보낸 분들이나 슈타이너 사상을 공부했던 분들은 반가울 수 있겠다!
(학교 구성원 가운데 혼자 인지학을 공부하는 이가 있다면 외롭게 고군분투하지 말고 모여 보아요~
경기도 소재 초등학교 가운데 발도르프 교육을 실천하는 곳이 많다 들었어요!)


동물학

4학년 무렵에 도입되는 과목이다.
동물학 시간에 먼저 인간을 다룬다. 교사가 풍부한 묘사를 하는데, 아이들이 인간에 대해 상을 그릴 수 있게 한다.
그다음 갑오징어나 쥐와 같은 동물을 다룬다.
척추동물과 무척추동물, 척추동물은 어류 양서류 파충류 조류 포유류...
이처럼 분류하고 각 종의 특징을 알아보는 시간이 아니다.
어떤 동물을 정해 그 생김새, 식성, 움직임 등을 교사가 자세히 들려준다.

D 선생님의 독일어는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오징어를 소개할 때는 한 마리의 오징어를 보는 것 같았고
쥐 이야기를 할 때는 눈을 반짝이며 잽싸게 움직이는 작은 설치류가 연상되었다.
지극정성인 통역자의 노력도 더해져, 아주 생생한 상이 내 가슴으로 들어왔다.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점이 무엇일까?
이성으로 상징되는 뛰어난 두뇌일까?
D 선생님은 바로 자유로운 두 손, 자기 의지를 담아 여러 행위를 할 수 있는 두 손 덕에 동물과 구별된다고 했다.
그 손으로 인간인 우리는 무얼 할 수 있을지 질문하셨다.

동물의 여러 특징을 인간이 지니고 있고, 인간의 어떤 특징 하나를 구체화하여 드러내는 게 동물이다.
동물은 넓게 펼쳐진 사람이고, 사람은 집약된 동물이라고 한다.
(무엇이 펼쳐지고 집약된 것인지는 더 공부해야 파악할 수 있을 듯.)
동물학의 시작이 '사람'이고 마지막도 '사람'이다.

난 '식물과 동물'의 순서대로 4학년과 식물을 다루고, 5학년 과학 시간에는 동물을 소개했다.
발도르프 학교에서는 동물학을 먼저 한 다음 식물학을 공부하는 흐름이 신선했다.


역사학

4학년 때 세계 고대사부터 시작한다.
나는 '국사'를 먼저 배운 이후 '세계사'를 공부하는 방식만 접했다.
그래서 중학생 때 들었던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집트 문명, 인도 문명 등
각 문명의 특징을 초등시절 정규교육과정에서 만난다고 하니 놀라웠다.
이런 접근의 장점이라면 민족이나 국가의 역사에 갇히지 않고
지구적(우주적)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자연스럽게 스밀 것 같다.

​그리고 수업을 전개하는 방식이 흥미로웠다.
동물학처럼 교사가 이미지가 풍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문명만의 상징 같은 것도 다룬다.
그런 다음 칠판에 그림을 그리는데 선생님이 그린 그림을 보고 있으면 나도 따라 그리고픈 마음이 들고,
저렇게 하면 나도 할 수 있겠다고 느낀다.
(경외감을 품고 교사를 대하는 초등 시기의 아이들을 떠올리면 얼마든지 가능한 풍경이다!)

그리스 문명을 공부한 후 선생님을 따라 큰 공책에 그림을 그렸다.
신전의 특징이라든지 기둥의 모양을 다시 언급하는 걸 들으며 부족한 걸 조금씩 채워갔다.
마지막에는 수업시간에 그린 그림을 다 함께 모아서 보았는데,
하나하나 뜯어보면 조금씩 다른 그림이 전체로 조화를 이루었다.

교사가 멋진 사진을 가져와 영상자료로 보여주는 게 아니라 아이들과 함께 직접 그림을 그린다.
칠판에 그림을 그리는 동안 눈은 뒤로도 열려 있어야 한다고 그런다.
(내 눈에는 대가의 경지처럼 보였다.)



이 외에도 날마다 두 꼭지씩 일반인간학이 배치되었고
예술활동으로 조소 수업과 오이리트미 시간도 있었다.
머리만 채우지 않고 가슴과 손발을 함께 일깨우는 수업 과정은
하루 열 시간 가량의 내용에 집중할 수 있게 한다.



본인의 연구 없이 다른 이의 수업내용, 교수법을 무조건 수용하면 모방에 불과하다.
외국 선생님들은 우리의 이야기를 찾고 우리 문화를 바탕으로 발도르프 교육을 전개하라고 당부하셨다.
한국의 신화나 성인들 이야기에는 무엇이 있는지 물었고 우리 노래를 한 곡쯤 배우고 싶다 하셨다.
그런데 머릿속에서는 도통 떠오르는 게 없었다. 우리에게 없는 게 아니라 내게 없는 것이었다.
어떤 선생님이 이끌어서 돌림노래로 '다 같이 돌자 동네 한 바퀴'를 불렀다.
윤석중 선생님이 노랫말을 붙인 원곡이 프랑스 민요라는 사실을 이번에 알았다.
독일에도 그 노래는 있단다. 닭이 죽었다는 노랫말로^^
다행히 어떤 용기 덕분에 우리 민요 아리랑과 도라지를 함께 불렀다.
아휴... 그것이 아니었으면 너무 부끄러웠을 듯하다.
강연자들이 결코 그런 생각 하지 않았겠으나, 물어도 대답 없는 이 나라는 대체 뭐니 싶었을 듯해서.



연수 때마다 짧은 경구를 하나씩 받는데
이번 안내문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다.
"아이들은 채우는 통이 아니라 타오르고픈 불입니다."
아이들만 그런 게 아니라 교사도 마찬가지이다.
온갖 이론과 교수법으로 나를 채우고 싶은 게 아니라 이상을 향한 열망에 불씨를 당길 계기를 찾는 것이겠다.

교육 운동가 이정희 선생님이 통역하다 이런 말씀을 하셨다.

"알고 실천합시다. 따라 하지 말고. 그래서 공부가 필요합니다."

그 말이 가슴에 콕 박혔다.
타인이 아니라 교사 자신을 가르치는 일, 자기연마를 중요하게 여기고 강조하는 말씀이
언제나처럼 가슴에 닿았다.
그리고 함께 공부하는 이들에게서 받는 기운도 컸다.
교사와 부모들이 꼬박꼬박 함께 참여하며 즐겁게 공부하는 학교,
곧 정년퇴임을 앞두고 있는데도 이런 자리를 찾아다니며 동료들과 나눌 생각에 기뻐하는 선생님,
아이를 잘 이해하고 싶고 선생님들에게 힘을 불어넣으려고 참여한다는 학부모,
아이들을 풍요롭게 만나기 위해 수강했다는 지역아동센터 활동가...
남들이 열심히 하는데 왜 내가 힘이 나는지^^

아! 조금씩조금씩 갈고닦으면 어디쯤엔가 가 있겠지.
끝없는 공부, 즐거운 인생!
전체 1

  • 2017-09-03 20:52
    후기 고맙습니다. 발도르프 연수 후기만 읽어도 제 마음속 불도 일어나는 것 같은 기분이에요. 선생님 마음의 불을 따라 아이들 마음에도 불이 켜지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