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학년들과 지내며

작성자
가야
작성일
2017-07-09 14:26
조회
1453
성장보고서를 쓰며 한 학기를 돌아본다.
아이들과 있었던 일이 하나둘 떠오른다.



달마다 아이들과 가벼운 실랑이를 한다. 생일편지를 쓸 때다.
“생일 축하해!”로 간단히 끝내지 말고
친구의 칭찬할 점, 좋은 점을 떠올려 적어보라고 부탁한다.

도무지 할 말이 없다고 고뇌하는 어린 영혼들과 나누는 대화를 종합하면 이렇다.

-선생님, 쓸 말 없어요. 도와주세요.
-OO의 좋은 점이 뭘까?
-없어요.
-누구나 좋은 점이 하나씩은 있어. 잘 떠올려봐.
-아이이~ 생각 안 나는데.
-아니야. 잘 떠올리면 생각 날 거야.
-진짜 없어요.
-OO랑 뭐하고 놀아?
-어제랑 오늘은 XX랑 놀아서 생각이 안 나요.



으.... 그러면 질문을 바꾼다.

-OO가 잘하는 걸 칭찬하면 어때?
-몰라요.
-평소에 그 친구 지내는 걸 떠올려 봐.
-(3초 생각) 잘하는 게 없는데요.



이런 대화에 성공해 술술 적는 아이도 있지만
아직도 떠올리지 못한 아이도 있다.
이쯤 되면 편지에 쓰면 좋을 간단한 말을 불러준다.

-“OO야, 넌 친구를 잘 도와줘서 멋있어.” 이건 어때?
-안 멋있는데요.
-너희 싸웠니?
-아니요.



끝까지 쓸 말이 없다고 버티는 아이를 향해
평범하고 일반적인 표현을 불러본다.

-“OO야, 우리 친하게 지내자.” 이렇게 쓰면 어때?
-싫어요.
-왜?
-걔랑 친해지기 싫으니까요. 전 딴 애랑 놀 거예요.
-그럼 ‘사이좋게 지내자’ 이건 괜찮아?
-네.

아!!
‘친하다’와 ‘사이좋다’의 미세한 차이를 구별하는 아이들 가운데
향후 우리말사전을 집필할 위대한 인물이 나오리라 믿어야만 한다.
마음에 없는 소리라고는 한마디도 할 줄 모르는 꼿꼿한 성정으로
아첨하지 않는 강직한 정치가가 나오리라 기대해야 한다.





학교밖학교 때의 일이다.
남의 도시락 염탐하며 뺏어먹길 좋아하는 내게 한없이 너그러운 아이가 올해 1학년에 나타나셨다.
유부초밥을 싸온 도시락통을 마구 흔들어대어 분리된 유부나 밥알이 자유분방한 상태를 즐거워하다
내용물은 자기가 먹고 도시락통에 남은 유부껍질을 내게 내밀며 “여기에 밥 싸 먹으면 맛있어요. 선생님 드세요.” 하고 내미는 아이.
먹기 싫어서 주는 건 결코 아니고 교사에게 자기 밥을 즐겨 나눠주는, 더러는 온전한 상태의 유부초밥을 몇 개씩이나 건네는 아이가
벗겨진 유부껍질은 나를 주었는데 예전보다 진일보한 행동이 추가되었다.
남은 밥알을 손바닥에 모아 주먹밥을 만들어 내게 권하기도 하고는 우적우적 먹는 것이었다.
나 역시 뭐든 잘 먹지만 차마 그걸 받아먹을 수는 없었는데 옆에 있던 여자애랑 눈이 마주쳐서 깔깔깔 함께 웃었다.

-나랑 같은 이유로 웃는 거야?
-네. 쟤가 손으로 조물락거리는 게 더럽고 웃겨요.

‘더럽게 웃겨요’라는 격한 표현이 아니라
‘더럽고 웃겨요’라는 웃긴 말이었다.





해마다 기상천외한 언행으로 강력해지는 아이들을 상대할 수단이 바닥나고 있다.
방학이 되면 강력충전해야겠다!
전체 5

  • 2017-07-10 17:22
    가야선생님~
    이 아이가 남의 아이였으면~ 하네요~ㅎㅎㅎ

  • 2017-07-12 14:31
    종빈이는 아닐꺼임. ^^;

  • 2017-07-22 19:40
    멋진여자모임 첫나들이(남자친구들 서운해하지 마세요) 후 어땟냐?는 엄마 질문에. 사이좋게 놀았어.라답한 제 딸. ㅋㅋ

  • 2017-07-12 19:55
    이어서 써주시지 않았다면 저는 정말 '더럽게 웃겨요' 라고 읽었을텐데 다시보니 '더럽고 웃겨요' 네요 얘들아 미안해 ㅎ

  • 2017-07-20 01:10
    유부초밥 두 번 싸줬는데 저도 승호는 아닐 거라고 굳게 믿습니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