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치킨

작성자
가야
작성일
2017-06-18 12:58
조회
1616
오늘은 1,2학년 생태교실. 서호에서 조류관찰을 하는 날이다.
물에 몸을 담근 가마우지가 물고기를 잡는다.
왜가리 한 마리는 몇 시간째 제자리에서 홀로 고고하다.
기상이 하늘을 찌를 듯한 일부 아해는 소리를 지른다.
날아가는 새를 잘 보려는 뜻이겠으나 이건 조류관찰이 아니라 조류퇴치다.

‘조류관찰’이라는 주제에 걸맞게 등장한 나는 오늘의 VIP.
아해들이 사랑하는 진정한 조류.
운기조식에 딱 좋은 조류.

도착하자마자 배가 고픈 아해들 덕분에 컴컴한 가방 속에서 빨리 나왔다.
나를 모시고 온 아해 주변에 아이들이 바글바글.
역시나 내 인기는 남녀노소를 사로잡는다.

난데없는 나의 등장이 아니꼬웠는지
내 인기에 흠집을 내려는 게 분명한 교사가 묻는다.
“너희는 치킨 때문에 얘랑 밥 먹는 거야, 같이 먹고 싶어서 옆에 앉은 거야?”
의리를 과시하는 풍운아가 답한다.
“전 얘랑 원래 친한데요.”
“진실이야?”
“당연하죠.”

교사는 ‘진실’이라는 귀한 낱말까지 써가며 아해들의 우정을 확인한다.
갑자기 치킨의 자존심에 금이 간다.
이 많은 인파는 나 때문이 아니었어...?

난 1세제곱센티미터당 백만 개의 냄새분자를 퍼뜨린다.
늦봄과 초여름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바람이 나를 돕는다.
아해들이 온다, 온다, 병아리떼처럼 치킨치킨치킨거리며 몰려온다.

이럴 줄 알고 의상을 두 벌이나 준비했다.
보송보송한 갈색 후라이드옷, 불그죽죽하고 번들거리는 양념옷.

아해들이 날 본다.
저 맑은 눈동자에 내가 각인된다.
왼쪽 눈동자에 후라이드, 오른쪽 눈동자에 양념.
침 넘어가는 목울대에 내 가슴살이 다 뜨겁다.
1학년 아해도 2학년 아해도 먹성 좋은 교사도 날 집어든다.


“형아, 나 하나만 먹어도 돼?”
귀한 손님 오셨다는 소식을 뒤늦게 들은 아해가 날 보며 묻는다.
군침이 간절한 아해의 좁은 숟가락에, 두 날개 활개 치며 자유로이 뛰놀던 시절을 떠올리는 나는 사뿐히 올라탄다.
아해는 황금알을 낳는 닭을 얻은 양 조심스레 자기 자리로 한걸음씩 옮긴다.
그래, 이게 바로 치킨으로 사는 맛이야!
날 귀히 모시는 마음, 아끼는 마음이 흔들거리는 숟가락을 타고 전해진다.
역시 오늘 오길 잘했어.

그런데.... 이럴 수가!
숟가락 위에서 의기양양했던 나는 순식간에 땅바닥으로 구르고 만다.
끈적끈적한 붉은 옷에 흙가루가 묻는다.
옆에서 호위하던 다른 아해가 잽싸게 나를 들어올린다.
그러나 손에서 미끄러져 또 떨어지고 만다.
이번에는 안 묻은 쪽까지 흙먼지를 고루 뒤집어쓴다.
숟가락 든 아해는 울상이다.

흙바닥에 뒹굴어버린 내 인생, 이대로 쓰레기통에 처박히겠지.
세상에 태어나 아해 뱃속 구경도 못하고 이렇게 간다.
‘치킨’이라는 이름값도 못하고 그냥 간다.
아까 소리를 치며 조류를 퇴치하던 아해들이 떠오른다.
그 조류에 나도 포함되는 것이었구나.
이 바닥이 이런 곳이었구나.
얌전히 집에나 있을 걸.
하필 밖에 나와서 이 무슨 운명이냐.

숟가락 아해는 나를 주워서 애처로이 바라본다.
그리고 교사에게 묻는다.
“씻어 먹어도 돼요?”

흙범벅인 나를 아해는 수돗가에 데려가 씻긴다.
교사까지 가세해서 함께 씻긴다.
양념 사이사이 보석처럼 박힌 흙알갱이들을 하나하나 떼어내고
흐르는 물에 빡빡 문지른다.
그러는 사이 윤기는 사라지고 옷은 흐물흐물해진다.
바삭하고 달콤한 내 인생은 온데간데없고 이젠 초라한 행색.
수돗물에 오래오래 몸담은 탓에 물기가 뚝뚝 떨어진다.
도저히 먹힐 수 없는 꼬락서니다.

그런데... 아해는 자리에 앉아 나를 먹는다.
한입에 감격하고 두입에 뿌듯해하며 먹는다.
뚝뚝 떨어지는 수돗물을 삼계탕 국물로 여기며 쪽쪽 빨아먹는다.
나는 침 가득한 입안을 지나 식도를 고속으로 달려 위로 직행한다.
아! 언제나 뜨뜻하고 활기찬 아해 뱃속이야.
교사가 묻는 소리가 들린다.
“무슨 맛이야?”
아이가 자신 있게 답한다.
“치킨맛이요.”

아하! 치킨맛!
흙바닥에 뒹굴어도 죽으란 법 없다.
내 이름은 치킨.


2017.6.9

 


 

전체 5

  • 2017-06-25 12:07
    저 물가의 조류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저 물가의 서 있는 조류를 먹은 아이들은 무얼 바라보는지......
    작가는 사물을 남다르게 보던데 vip 치킨의 입장에서 쓴 남다른 글을 보며 물가는 아니지만 여러가지 생각을 해봅니다.
    호색한 호식이 치킨사장과 공정위 무서워 도망간 bbq 사장 그런 조류를 맥주와 함께 치느님으로 떠받드는 저 자신에 대해서도요.

  • 2017-06-26 11:04
    ^^* ^^;;; ㅠㅠ;;

  • 2017-06-28 23:43
    물에 박박씻긴 치킨의 모습을 아무리 상상력을 입혀 봐도 끝내 군침이 돌지 않는데... 숟가락 아해는 정말 대단한 치킨매니아 ~~ ㅎㅎㅎ

  • 2017-06-29 21:12
    식도를 지나는 치킨의 울부짖음이 들리는듯합니다 ㅋ

  • 2017-07-03 22:26
    ㅎㅎ 역쉬 가야선생님!!
    독특한 시점,, 3인칭 관찰자 시점도 아닌, 치킨 관찰자 시점의 글!!
    치킨치킨치킨~~ 웃음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