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줌도 편하게 못 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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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27 15:12
조회
1484
중학교 2학년 때 윤동주 시인을 처음 알았다. 처음으로 내 돈을 주고 시집을 샀다.『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그런데 시가 어려웠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뭔가 의미 있는 것 같은데, 그 감정이 무엇인지도 잘 몰랐다.

분단의 아픔이나 나라를 뺏긴 것에 대한 분노, 이런 것이 내게는 먼 감정이었다. 생소했다.

분명하게 기억나는 것은 ‘반공’교육. 이승복 어린이가 잔인하게 살해 되는 영상물을 500원씩 내고 학교에서 봤던 기억은 난다.

그리고 20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아이들과 윤동주 동시를 만났다.

아이들과 만난 유동주 동시는 어렵지 않았다. 시를 외며 그림 그리고, 느낌을 나누고 자유롭게 상상한다. 재밌다.

시어가 알알이 가슴으로 들어온다. 함께 입을 모아 외면 더 재밌다.

같은 시를 함께 보고 외니 공통의 문화가 만들어 진다. 없던 관심도 새록새록 올라온다.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 시가 어렵지 않다.

참 좋은 것 같다.

그리고 덤으로 웃긴 일도 종종 생긴다.

 

오늘 점심 때 일이다.

화장실에 나와 4학년 여학생 1이 있었다.

초록샘 선생님이 다급하게 뛰어 들어오신다. 가운데 화장실로 들어가신다. 오줌을 누신다.

이를 닦고 난 4학년 여학생 1이 나가다 말고 초록샘 선생님을 부른다.

 

“초록샘 선생님”

“왜”

“저 시 외울게요!”

“지금???”

“네!”

아이의 단호한 대답에 물러설 길 없었던 초록샘 선생님은 대답하신다.

“해 보세요.”

4학년 여학생 1이 시를 왼다.

초록샘 선생님은 오줌을 누신다.

4학년 여학생은 또박또박 시를 왼다.


윤동주

 

우리 아기는

아래 발치에서 코올코올

고양이는

부뚜막에서 가릉가릉

아기 바람이

나뭇가지에 소올소올

아저씨 해님이

하늘 한 가운데 째앵째앵
 

화장실 문을 사이에 두고 시를 외는 어린이, 시를 듣는 교사, 이를 모두 볼 수밖에 없는 나.

그때 4학년 여학생 2가 들어온다.

“하하하하!!! 여기서 하는 거야? 웃기다”

4학년 여학생 1은 통과를 받고 기분 좋게 나간다.

볼 일과 갑작스런 일을 모두 보신 초록샘 선생님이 나오시며 하시는 말

“아이고, 오줌도 편하게 못 눈다(경상도 사투리).”
전체 8

  • 2019-03-27 16:00
    시가 참 좋네요~ 산선생님 덕분에 좋은 시 한 편과 재미있는 이야기 한 편 보고 갑니다~!!

  • 2019-03-28 14:15
    ㅋㅋㅋㅋㅋ 눈에 선하네요^^
    작년에 1학년 아이들과 화장실 문을 두고 통성명했던 기억도 나면서..

    윤동주 시를 교과서로 만나 어떤 프레임이 있었던 것같아요. 집에서 아이가 들려주는 시가 너무 좋아 아빠는 동영상도 찍고... 아까운 시가 겨우 18편인가? 밖에 남지 못한 일.. 인체실험 당한일들을 이야기하면서 아름다운 시와 대비되어 가슴이 너무 아프더라구요.ㅜㅜ

  • 2019-03-28 18:18
    윤동주시인의 순수함이 그대로 느껴집니다.
    4학년 1의 순수함도 그대로 묻어나네요.
    일제치하 엄혹한 시기 젊은 나이에 일찍 가신 윤동주의 삶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 2019-03-28 20:35
    시는 참 좋다고 알고는 있지만 함께하지 못했는데 아이입에서 시가 낭독을 들을 수 있어 행복하네요. 집에 있는 윤동주 시집을 꺼내 같이 보게되는 일도 생기고...
    아이들 영혼이 더 맑아지고 풍성해지는 것 같습니다.

  • 2019-03-29 14:04
    아... 지난 겨울에 재윤이가 서점에서 "스스로" 골라서 하.바.별.시를 사길래 별 일 다 본다 했는데...ㅠ
    올해 산 선생님과 초록샘 선생님과 함께 윤동주 시인을 만날 수 있었는데...
    이거야 원, 재윤이를 택배로 보내고 싶은 심정이네요ㅠ

    • 2019-03-30 00:00
      와!~~~~
      어떻게 지내셔요??
      몹시 궁금하네요!!
      재윤, 소윤이의 흔적이 학교 곳곳에 남아 있어 너무 보고 싶어요!!
      그나저나 재윤이는 어찌 알았을까요??
      우리가 윤동주 시인과 이토록 가까워질지...
      어딜가든 빼박 칠보산 어린이가 분명합니다!~
      빨리 보고 싶어요~~

  • 2019-03-29 15:23
    4학년에서 윤동주 시인을 만나는 기회가 있네요~~~

    1의 마음을 알듯..
    외웠을때 빨리 숙제를 하고픈 마음 이해됩니다~~
    화장실에서 시를 듣고 있는 산..초록샘 의 얼굴이 그림처럼 보여요 ㅋㅋ

  • 2019-04-26 22:10
    산선생님의 생생한 이야기 덕분에 초록샘 선생님 음성이 그대로 느껴지네요~
    저 상황들이 눈앞에 그려져요^^
    한참을 웃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