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와 인형의 여행

작성자
가야
작성일
2016-09-12 23:06
조회
2005
부모님들 책모임 '민들레'모임의 이번 책이 『시인의 집』이라는 말을 들었다. 참 반갑다.
우리 학교 어떤 이들은 『시인의 집』을 ‘노란 책’이라는 별칭으로 부르며 한 계절이 다른 계절로 바뀔 때까지 오래오래 벗으로 삼기도 했다. 지금쯤이면 입소문을 타고 여러 사람들이 봤을 거다.

책의 두께가 우리를 압박하더라도 두려움을 내려놓고 책을 열자.
그러면 우리는 아름다운 시인들의 집으로 가는 초대장을 받는다.
그러다 책 어디쯤에서, 인형을 잃어버린 아이에게 편지를 썼던 시인 같은 소설가를 만난다. <변신>의 카프카를.

어느 날 카프카는 공원에서 울고 있는 아이와 마주친다. 공원의 평온함을 쨍한 울음소리로 깬 아이.
아이가 우는 까닭은 길을 잃었기 때문이다. 아이가 아니라 아이의 인형이.
아이를 달래는 카프카는, 인형이 여행을 떠났다고 들려준다.
한 치의 거짓도 없이, 그렇다고 정교하게 꾸며낸 이야기를 들려줄 계획도 없이,
자기도 모르게 그리 말해버렸다.


“아이는 그에게 겁을 내지 않았다. 티 없이 순수했다. 인생이 꽃을 피우기 시작할 때는 모든 것이 창문이고 열려 있는 문이었다. 아이의 눈에는 고통과 아픔, 슬픔, 그리고 꽃잎과 같은 감수성을 갖게 해준 감추어진 감정이 엿보였다.”


자기의 인형이 여행을 떠났다는 카프카의 말을 온전히 믿었던 아이.
아이에게 카프카는, 인형들의 편지를 배달하는 우편배달부였다.

지금은 다 기억나지 않겠지만 우리는 온갖 어려움을 맞닥뜨리며 자라왔다.
뭔가를 설명하는 선생님의 말을 깨고 질문하는 게 너무나 겁이 났던 순간이 있었을 것이고, 제법 똑똑해 보이는 친구의 말투는 언제나 센 것 같아 내 의견을 감히 꺼낼 생각도 못했던 때가 있었을 게다. 선생님들은 실수해도 괜찮다 말씀하시지만 내가 틀린 답을 말하면 표정이 좀 안 좋은 것처럼 느껴지고, 남들 다 가진 장난감이 나만 없을 때 왠지 따돌림 당하는 듯한 마음도 들었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자기 앞에 닥친 문제와 어려움은 언제나 큰 법이다. 많은 것이 최초인 아이들은 오죽할까.
한 번도 겪은 적 없던 어려움을 아이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산전수전 거친 어른의 눈으로는 아이들이 꺼내는 문제가 사소할지 모르고, 제법 무겁더라도 지금 이 순간을 참고 견디면 반드시 얻는 게 있다고 힘주어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아이들의 문제를 시원하게 해결해줄 수 없다. 아이가 자기 삶 최초의 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게 할지, 첫 문제나 첫 어려움을 겪는 과정에서 무엇이 스며들게 할지 우리의 몫을 떠올릴 뿐이다.

인형을 잃어버린 아이에게 나는 무얼 할까.
그러니 평소에 물건을 잘 간수했어야 한다고 타이르며 버릇을 고치는 기회로 삼겠지.
이제 네 나이가 인형 따위에 절절맬 때가 아니라며 다른 세계로 훌쩍 보내버릴지 몰라.
전보다 더 아름다운 인형을 사주어 아이를 다정하게 위로하는 게 낫겠네.

카프카는 엘시의 인형 브리지다가 세계를 여행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곳곳을. 인생 최초의 상실을 겪는 아이에게, 상실을 마주하는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 환상적인 이야기를 통해 전한 것이다.

카프카를 연구하는 이가 신문광고까지 내며 그의 편지를 받은 어린이를 찾아 헤맸으나 그 아이도 편지도 미궁이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20세기의 아름다운 산문. 카프카의 편지를 읽은 적 없지만 아름다운 산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건 ‘단 한 사람의 노력’ 때문이겠지.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고, 상실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는 기회를 주고 싶었던 카프카의 노력. 자신이 극심하게 아픈 와중에도, 작품을 써야 하는 귀한 시간에 어린이 한 명을 위해 최선을 다한 카프카.


“언젠가 내가 편지를 그만 쓰게 될 때, 우리 둘 모두 서로가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거라는 것을 알게 될 거야. 우리 각자는 서로에 대한 기억 안에서 살게 될 것이고 그게 바로 영원이라고 생각해, 엘시. 왜냐하면 사랑이 없이 시간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야. 내가 떠났을 때 너는 울었지. 그렇지만 나는 네가 웃고 노래 불렀으면 좋겠어. 그리고 미래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발견해야 할 신비라고 생각했으면 좋겠어. 세상에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장소들이 있어. 아프리카가 바로 그런 장소들 중 하나야. 사람들이 그런 장소들을 바꾸어 놓지 않게 되기를 바랄 뿐이야. 별이 빛나는 오늘 밤에는 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네 생각이 간절하게 나는구나. 그리고 몹시 부러워. 네 앞에 펼쳐진 모든 것들이...”

-인형 브리지다가 엘시에게 쓴 편지



미래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발견해야 할 신비.

‘조르디 시에라 이 파브라’라는 작가가 카프카 이야기를 소재로 동화를 한 편 썼다.
우리나라에 문지아이들 시리즈로 출판되었고 초등 5-6학년이 읽기에 적합하다고 똑부러지게 뒤표지에 박혀 있다.
그러나 내가 아는 5,6학년들이 이 책이 자기들 읽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할지 잘 모르겠다.
아이들의 독서취향은 당당하게 우리의 기대를 배반하므로.

조르디가 창조한 허구에서 우리는 어떤 진실을 만난다.
미약한 존재인 내가 마음 아파하는 누군가를 위해 기울이는 최선의 노력은, 지금은 그 아이를 겨우겨우 위로나 하면 다행인 수준이겠지만
언젠가는 우리 모두의 삶을 어떻게든 바꿔놓는다고.

그리고 이 책은 어른을 위한 동화에 가깝다.
아이들의 세계를 아름답고 풍요롭게 가꿔나가고픈 꿈을 지닌 어른이 보면 좋을 동화.
아이와 관련 없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도,
어느 날 문득 한 존재가 내게 큰 의미가 되어 성큼 다가온 경험을 한 사람이라면 절로 공감할 그런 동화.

『카프카와 인형의 여행』 한 번 읽어보시길.
서수원도서관에 있다^^


 

전체 3

  • 2016-09-14 22:55
    글쓰기의 인용 기능으로 예뿌게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ㅎ

  • 2016-10-11 02:55
    자신의 소설에 암담하고 암울한 현실을 망치로 정을 박듯 썼던 카프카! 그가 소녀에게 보낸 편지는 어둡고 비극적이었던 작가가 바랐던 또 다른 삶이었을까 싶어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 노란책을 읽다 보면 작가들의 삶을 반추하고 살피며 현재를 살아내는 나와 당신, 우리들이 보입니다. '미래'가 발견해야 할 신비가 되는 나이는 5,6학년이어야 할텐데요. 아니면 뒤늣게 20대, 30대 때만이라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 2016-11-22 20:01
    꼭 읽어봐야 겠어요. 좋은 책 추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