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학년의 늦은 귀가

작성자
가야
작성일
2016-07-16 12:30
조회
1943
지난 6월 반모임 이후 마음이 살짝 무거웠다. 내가 아이들 분위기를 나쁘게 말했나, 아이들이 지닌 무한한 가능성을 축소하고 흠만 잡았나. 현명한 부모님들이 담임교사의 성향과 지도방식까지 두루 이해하고 아이들을 너그러이 바라보리라 믿는다.
조금은 엄격한 학기 마무리를 아이들이 순순히 따르니 미안하고 고맙다. 청소라든지 풀뽑기라든지 그걸 왜 우리가 하느냐고 묻는 아이도 있었다. 그럼 이 지경을 너희는 보고만 있는 사람이 될래, 나서서 하는 사람이 될래 물으니 나서서 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한다. (이런 이분법적 질문이 통하는 아이들의 순진함, 그리고 인간 내면에 단단히 뿌리내린 선함은 얼마나 고마운가!)

전체 물놀이 때였다. 전교생 먹을 라면 끓이는 일이 힘들 것 같다던 아이들이 기쁘게 참여한다. 수산나 선생님이 모둠 수에 맞춰 냄비와 버너, 필요한 집기를 준비해주신 덕이다. 아이들의 자발성을 이끌어낼 때 그 구조를 마련하는 게 참 중요한 일임을 새삼 느낀다.

1,2,3학년이 먼저 나가고 4,5,6학년은 뒤에 남았다. 그 중에서도 4학년은 좀 놀다가 출발이 가장 늦었다.

돌아다니며 바닥에 떨어진 라면 가닥을 주워라,
다른 사람이 놓고 간 물건이 없는지 수영장 한 바퀴 쭉 둘러봐라,
탈의실에 가서 남은 물건 없는지 살펴봐라,
바람 빼지 않은 튜브가 있으면 친구들 대신 빼라,
늦게 하고 시간 걸리는 친구들이 있을 때 말로만 탓하지 말고 도와주면서 재촉해라...

이런저런 잔소리가 끊이질 않는데 아이들은 그걸 기꺼이 듣는다. 앞으로 무슨 행사를 하든 두루 살필 줄 아는 고학년이 되어야 한다고 당부한다. 일부 아이들은 알아듣는 표정이고, 일부는 선생님이 왜 자꾸 저럴까 싶은 표정이다. 아이들만 남겨두고 가출하기로 결심한 엄마의 심정으로, 당부 또 당부....

그나저나 버너와 냄비가 남았다. 더 놀기로 남은 학년이 함께 라면을 끓여먹은 냄비이다.
-그거 선생님이 갖다놓는 거 아니었어요?
누군가 묻는 말에, 몇몇 아이가 그렇게 말하는 거 아니라 하고, 나 역시 그렇게는 할 수 없다고 답한다. 웅성웅성 웅성웅성 계속 웅성웅성. 잠시 침묵. 용민이가 나서서 반장인 내가 하겠다 한다. 몇몇 아이들이 그럼 그렇게 해 말한다. 용민이 마음은 고맙지만 반장이 꼭 그래야 하는 건 아니라고 의논해보라고 답한다.
해야 할 일이 있는데 누구도 나서지 않을 때 이걸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용민이는 자기가 반장이니까 반장이 하는 게 맞다고 한다. 남이 반장이면 그렇게 주장하지 않을 거면서 꼭 그런다. 본인의 말대로 매너남이라서. 반장단인 인서와 해찬이가 함께 고민한다. 반장단이 해야 할 것 같은데 반장단이 다 맡는 건 아닌 것 같단다.

몇 명이 학교에 갈 것인가, 어떤 방식으로 뽑을 것인가 한참 의논한다.
가위바위보를 하자고 하니 가위바위보를 못하는 누군가가 그러면 내가 뽑힌다고 싫다고 하고,
전체가 한꺼번에 말하지 말고 모둠별로 한 명씩 뽑자고 하니 그럼 우리 모둠이 불리하다며 별로라고 하고. 그럼 어쩌라고! 누군가 버럭 하니까 그제야 모둠별로 한 명씩 뽑는 게 낫겠다고 한다.
그런데 생각보다 사람을 여럿 뽑았다. 그 이유는 이렇다. 남자아이가 걸리면 한 사람이어도 되는데, 여자아이들은 힘이 약해서 많은 짐을 한꺼번에 들고 갈 수 없단다. 여자들이 걸릴지 모르니까 여러 명을 뽑는 게 낫다고 한다. 또 내 가방 옆에 쓰레기봉투가 있었는데, 그걸 들을 사람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먹기는 우리가 먹었는데 선생님이 다 들고 갈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영광의 두 명이 뽑혔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수영장에서 버스정류장까지,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 만큼 냄비와 버너를 옮겨야 하는데, 그 일 할 사람을 안 뽑았다고 서로 미루며 아무도 안 나선다.
-아휴, 내가 한다, 내가 해!
남자애 하나가 두 개를 겹쳐서 번쩍 든다.
-안 힘들어?
-이 정도쯤이야! 제가 좀 힘이 세죠.

내가 앞장서지 않아도 자기들끼리 잘 가는 뒷모습을 보고 있으니 흐뭇하다.
-올해 우리가 라면을 끓였으니까 내년에도 4학년이 하는 거죠?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걸. 너희가 해보았으니 당연히 또 하겠지. 원래 일은 눈에 보이는 사람이 하는 거야.
-아~ 선생니이임!!

분명히 집에 돌아가면 뭐든 4학년이 하는 것 같아 힘들었다고 나는 라면도 제대로 못 먹었다고 샤워장에서 동생들 옷 갈아입는 것 봐주느라 잘 놀지도 못했다고 말하겠지. 그것도 일면 사실이지만 집에 돌아오는 길, 아이들 얼굴에서 뿌듯함과 자랑스러움을 읽었다. 하루 만에 어쩐지 커져버린 듯한 이 아이들의 정다운 투정이 참 듣기 좋다.
하지만 이런 감정도 잠시일 뿐... 집까지 빨리 가려면 빨간버스를 타야 하는데 누군가 조용히 말한다.
-그거 타면 버스비가 많이 나와.
-그래도 빨리 가는 게 낫지.
-넌 돈 많으니까 그렇지! 너나 그거 타고 가!

비싼 버스를 타고 빨리 갈지, 싼 버스를 타고 돌아서 갈지 그 의논이 또 길어진다. 고심한 반장은 멀리 돌아가도 버스비가 적게 나오는 게 낫겠다고 한다. 버스비가 많이 나오면 걔가 얼마나 속상하겠냐면서. 정말 꼭 그래야 할까 싶다. 난 저녁에 면담과 약속이 있어서 빨리 가야 하는데 전화기 배터리가 없어서 연락은 안 되는데 정말 이렇게 돌아가야 하나 싶지만, 오늘 하루 통째를 아이들에게 맡기기로 한 건 내 결정 아닌가. 하는 수 없이 아이들 뜻대로 한다.

버스에 올라탄 아이들은 신났다. 몇몇은 아까 몰래 챙긴 라면스프를 손바닥에 털어서 핥아먹고 있다. 몇몇은 고개가 뒤로 넘어가 침 흘리며 잠들었고, 어떤 아이는 다른 승객이 묻는 말에 차분히 답한다.
-우리 대단한 일 하는 것 같다.
-오늘 일곱 시에 맛있는 거 먹기로 했는데, 그 전에 도착하겠지?
-아, 맞다! 엄마가 기다릴 텐데.
-선생님, 저 오늘 동생 데리러 다섯시반까지 어린이집 가야 하는데요.
-야, 시계를 봐! 지금 몇 시인지. 넌 이미 늦었어.
아이들끼리 주고받는 이야기를 듣다가 갑자기 떠오른다.

-근데 애들아! 수산나 선생님이 놀라고 주신 공! 아.. 수영장에 놓고 왔나 봐.
챙긴다고 했는데 또 놓쳤구나 싶어 한숨을 쉬니 반장이 말한다.
-제가 가방에 넣었어요.
그 애 가방이 유달리 불룩했던 까닭이 있었다. 친구들과 승객들이 불편하다며 냄비며 버너며 쓰레기봉투까지 다 끌어안고 있는 반장의 속이 깊다. 애들아, 내가 내릴 때 말해줄 테니까 피곤하면 자! 아... 이렇게 멋진 말까지.

반장단을 비롯해 기대 이상으로 해낸 4학년 아이들이 참 고맙다. 물놀이 하느라 피곤했을 텐데 투정부리지 않고 마지막까지 즐거운 얼굴이었던 아이들이 대견하다. 그래도 7시나 되어 도착하는 건 나도 아이들도 좀 그러니, 앞으로는 아이들과 내가 역할을 잘 나눠맡아야겠다.
그나저나...
이 날은 곳곳에 폭염주의보가 내렸다고 했다. 하지만 물놀이장에서 종일 아이들과 지내느라 잘 몰랐다. 햇볕 쨍쨍 내리쬐는 파란 하늘과 흰 구름 보면서, 아 물놀이하기에 딱 좋은 날씨구나 생각했다. 금요일이면 학교밖학교인 걸 잘 아는 분이 전화를 걸었던데 밤늦게야 통화를 해보니, 내내 푹푹 찌는 날이었다고 애들 데리고 여기저기 쏘다니다 사고 날까 걱정되어 전화했다고 한다. “전혀 몰랐어요! 전교생이 수영장에서 잘 놀았는데요!” 기분 좋게 대답했다.
전화를 끊고 나니 갑자기 마음에 걸린다. 이곳의 내가 세상과 교류하지 않는 건 아니나, 아이들과 지내는 일에 골몰하여 다른 것은 못 볼 때가 있다. 육체노동에 의존하여 삶을 꾸리는 사람에게 고작 그런 말밖에 할 수 없었는지, 내가 먼저 전화 걸어 염려할 수는 없었는지 밀려오는 부끄러움. 내가 속한 공간의 한계가 아니라 언제나 나의 한계. 한계의 극복, 또다시 각인되는 내 과제여!

 



땅에 떨어진 라면 부스러기를 주워 먹을까 말까 고민하던 아이가 보인다.

흘린 거 3초 안에 먹으면 괜찮아, 말하던 다른 아이도!

 

 



졸음을 버티다 잠깐 눈을 붙인 반장. 역할을 맡은 아이들이 쏟아지는 졸음을 버티려 애쓸 때의 모습은 언제나 경이롭다!
전체 5

  • 2016-07-16 21:41
    용민이가 언제 이리 듬직하게 컸데요. 완전 멋짐!
    4학년들 걱정했는데 빡센 학기말 마무리를 잘 해내는거 보니 흐뭇해요. 멋진 고학년으로 자랄 수 있을거에요!

  • 2016-07-16 21:50
    애들 다왔다고 말해주려면 자면 안되는데...반장님!
    뭐든 의논하며 다 해내는 놀라운 4학년 넘들이네요.
    내년에 4학년이 라면 끓일 수 있을라나....모르겠어요. 못할 것 같으면서도 기대되네요.
    뒤에 남아서 이것 저것 보살피는 아이들과 선생님! 그리고 남다른 반장님의 멘트들........ 그날 하루는 용민반장님과 4학년의 날이네요.

  • 2016-07-18 08:45
    고학년이 했어야 할일을 4학년이 용케 해내주었네요. 역시 교육은 교실에만 있는게 아니었어요. ^^

  • 2016-08-07 13:18
    용민 반장님 피곤이 목덜미에서도 느껴지네요. 언제 이렇게 컸는지^^

  • 2016-08-29 13:53
    흘린 거 3초 안에 먹으면 정말 괜찮나요?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