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16일] 다른 질문을 던지는 힘 - by 가야

작성자
teacher
작성일
2016-05-18 11:00
조회
1650

주어진 질문에 답을 찾는 힘도 중요하겠지만, 다른 질문을 던지는 힘도 중요하다. 
지금까지 누구도 하지 않았던 질문에는, 판을 달리 보는 시각과 독특한 생각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들이 질문을 던질 때, 비록 내가 답을 다 할 수는 없어도 참 좋은 질문을 했다고 반응하는 편이다. (아이들의 단골질문 “강아지나 고양이 키워요?”만 빼고^^)

우리 학교의 좋은 점이 여럿 있는데, 아이들과 함께 지내노라면, 내가 격려하는 종류의 인간으로 나 자신이 서서히 바뀌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최근에 나는 아이들에게 어떤 질문을 던졌는데, 내가 생각해도 좀 훌륭한 질문이 나왔다. 어느 정도로 훌륭했냐면, 내 질문에 스스로 감탄할 정도로 훌륭했다.



한 아이가 책상을 칼로 살짝 깎는 모습이 포착된 날이었다.
학교 물건 소중히 써야 한다는 잔소리와 여럿이 쓰는 물건을 함부로 썼다가 크게 혼이 난다는 엄포가 되풀이되는 요즘이었다. 배에 힘을 주고 어마어마하게 큰소리로 말을 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엄청 혼이 나겠구나 싶었을 것이다. 오늘 같은 날 걸리면 끝장이구나 걱정도 되었을 것이다.


“방금 전 책상을 칼로 깎은 사람 손 들어보세요.” 말하니 아이는 손을 들지 않는다. 
모두 눈을 감게 하고 다시 묻는다. 여전히 손을 들지 않는다. 
순간, 번뜩이는 생각이 떠올랐다.
“방금 전 책상을 칼로 깎았는데 너무 부끄러워서 손을 못 들겠는 사람, 손 들어보세요.”
그러니 부끄러움을 아는 순진한 아이가 순식간에 손을 든다.
자꾸만 웃음이 나온다. 다른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아이들이여, 그대들이 4학년이지?



반장단으로 나올 사람은 유세문을 먼저 써오라고 했더니 나오겠다는 아이가 한 명도 없다. 유세문이 부담인가 싶어 몇몇에게 따로 물었는데 아니란다. 내 눈에는 분명 마음이 있는 것 같은 아이도, 별로 안 하고 싶다는 쪽으로 마음을 굳힌다. 유세문이 쓰기 싫어서 반장단 안 나오겠다는 아이는 이씨(李氏) 집안의 자손 딱 한 명뿐이었다. 
반장을 뽑아야 하는 학년회의 당일. 후보가 아무도 없다.
그래서 방법을 하나 제안한다. 종이를 나눠주고 거기에 반장, 칠판서기, 공책서기를 하면 좋을 사람들 이름을 적어보라고 했다. 자기 이름을 써도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표를 하나하나 열어서 이름을 부른다. 임시 칠판서기 민지가 재빠르게 이름을 받아적는다.
우리반 열네 명의 이름이 칠판에 빼곡하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골고루 나왔다. 일부 직책에서 많은 표를 얻은 아이도 있는데 그래봤자 두세 표가 전부이다. 남들 앞에 나서는 일은 절대로 안 할 것 같은 아이도, 자기 이름을 정성껏 적었다. 
내 몸에 익은 방법으로 반을 꾸렸다가는 너희 안의 열망을 못 알아볼 뻔했구나. 
우리 4학년들아! 그래, 다르게 다르게, 지금과는 다르게!



방과후에 뭐하고 놀 건지, 이따 쉬는 시간에 누구와 탁구를 칠 건지... 
이러한 의논을 수업시간에 하는 아이들을 보다가, 나도 말 좀 하자고 야단을 친다.
우악스럽게 불리는 제 이름을 자기 귀로 들어야만 일시정지.
어떤 엄포에도 굴하지 않고 종알종알거리는, 
무한 오토리버스 기능을 갖춘 아이들이 눈에 들어온다.
아이들과 몇 가지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갑자기 웃음이 나와 버린다.
(지금은 내용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데, 대단히 웃기고 어이도 없고, 규빈이네 4학년 시절처럼 놀라운 이야기였다.)
“난 수업시간에 너희들이 이러는 모습이 정말정말정말 익숙하지 않은데, 혹시 바뀔 마음이 있어?”
그랬더니 “네!” 합창을 한다.
아이들의 밝은 목소리에 이번에도 괜찮은 질문이 떠오른다. 
“그럼 내가 어떻게 도와줄까?”

웃는 모습이 어여쁜 여자아이가 크게 대답한다.
“우리는 아무리 야단을 맞아도 몸이 저절로 움직여져요. 하지 말라고 계속 말해주세요!”



아이의 말처럼 내가 계속 말할 수 있을까? ‘말만’ 할 수 있을까?
아마 이놈의 성질머리 때문에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바뀌기보다는 아이들의 어떤 모습을 내 뜻대로 바꿔놓겠다는 의지가 앞서고 말 것이다. 
매일의 숙제와 반복되는 연습을 통해서. 야단과 잔소리와 엄포를 앞세워서. 


그래도 나 자신에게 기대되는 바가 있다면, 때때로 놀라운 질문들이 떠오르리란 사실^^
내가 머물고 있는 이곳이 신비한 힘으로 돌아가는 우리 학교이므로. 
내가 지금 만난 아이들이 신비한 힘에 사로잡힌 4학년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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