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 20일] 무엇을 어떻게 만나게 할 것인가 - by 가야

작성자
teacher
작성일
2016-05-18 10:50
조회
1501
며칠 전, 2학년 수시간이었다. <길이재기> 수업 첫 시간이다.
준비물로 30센티미터 자를 가져오라고 했다. 
첫시간부터 뭔가 재볼 계획은 아니었다. 
길이재기 시간이니까 언젠가는 자가 필요할 것이고, 미리 준비하면 좋을 것 같아서 
그리고 30센티미터 자가 가장 흔할 테니 그걸 가져오라고 한 거다.

한 명이 공책에 자를 대고 줄긋기를 한다. 
그 모습이 내 눈에 퍽이나 재미있어 보인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누군가는 그 친구를 따라 벌써 그렸다.
옆사람도 기웃, 다른 친구도 기웃.
그러니 이왕이면 다함께 줄을 긋자고 한다. 

왼손으로 자를 꾹 누르고 연필을 든 오른손으로 직선을 그린다.
두 손의 협업이 내 마음처럼 되지는 않는다. 
왼손으로 자를 누르고 있는 것도 힘이 드는데, 연필을 쥔 오른손이 자의 앞부분을 따라 쭉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손이 엉킨다. 자가 흔들리고 선이 비뚤다.

"선생님 선이 자꾸 비뚤어지는데 괜찮아요?"

자를 대고 선긋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다, 
처음부터 반듯하게 그리기 어렵다, 비뚤어져도 괜찮다 말하는데도
아이들은 선이 자꾸 비뚤어진다고 말한다.
3분 이내에 이 말을 열두 번도 넘게 들었던 것 같다.

직선은 곧은 선, 곧은 선은 곧게 그려야 한다는 개념이 
가르치지 않아도 아이들 안에 존재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선험'이나 '직관'이라는 말을 이런 때 쓰는 건가 잠시 궁금하다. 


공책에 선을 긋는 아이들은 동시에 이 질문도 여러 번 했다.
"선생님 이만하게 그려도 돼요?"
선을 그리는 것이야 제 마음대로 하며 될 텐데, 왜 자꾸 물어보는지 나는 이상하다.
이 상황에서 나의 허락과 동의를 구하는 까닭이 뭘까 속으로만 생각한다.
교사의 분명한 제시가 없었나 싶고 똑같은 대답을 자꾸 하기가 좀 귀찮아서 
각자 긋고 싶은 길이대로 선을 그려보라고 했다.

많이 그리면 힘이 드니까 가로로 열 줄, 세로로 열 줄 그린다.
공책 왼쪽부터 오른쪽까지 꽉 차게 그리는 친구들이 많다.
(가로와 세로의 뜻이 뭔지 서로 이야기를 하다, 누군가 공책 방향을 돌리며 새로운 궁금나라로 몇 아이들을 데려가기도 했다!)

가로긋기는 그럭저럭 괜찮았는데 세로긋기를 하니 아이들이 한바탕 묻는다.
"선생님 자가 공책을 넘어가 버렸어요!"
"선생님 큰일났어요. 선을 계속 그으니까 위에 날짜 쓴 데까지 선이 닿아요."
"공책이 작고 자가 더 큰데 선을 어떻게 그려요?"

아! 아이들은 참 놀랍다.
긋고 싶은 길이대로 그리라고 했으니 길이를 알아서 조절할 것 같은데 그게 아니다.

한 친구의 공책을 보여주면서, 
얘처럼 세로로 그은 선을 짧게 그리면 된다고 했다.
그런데도 절반쯤의 아이들은 
자가 공책을 넘는다, 자가 공책에 닿는 부분은 따라서 선을 그렸는데 나머지 허공에 뜬 부분은 못 그렸다,
내가 쓴 글자를 선이 다 가린다... 이런 뜻의 이야기를 자꾸 한다. 


아이들의 이러한 모습이 참 신기해서 봄날선생님에게 요약해서 상황을 전하고 
저학년 시기에 자를 어떻게 도입했는지 물었더니 사례를 들려주시며
"주어진 도구만큼, 도구의 한계만큼 생각하기도 하는 아이들"이라는 말을 했던 것 같다.

이 말이 오래 맴돈다. 


다음날 수 시간.
한 아이가 대단한 사실을 발견했다. 
플라스틱 자를 눈 가까이에 대고 그걸 잘 조절하며 세상을 보면 
무지개도 보이고 선생님의 다리가 길어 보이고 친구의 눈이 두 개로 보이고 
교실 안 다른 물건이 투명한 자에 비쳐 보이기도 한다는 것을 알아낸 거다!
그래서 이번에는 모두가 자를 눈에 대고 각도를 조절하면서
친구 얼굴도 보고 남이 보인다는 무지개도 찾아보고 그렇게 한다.
이런 건 아무도 안 묻고 서로를 따라하며 알아서 잘 한다. 


이렇게 길이재기 시간을 보냈다.
우리 손에 달린 손가락을 쭉 뻗은 뼘으로 책상의 길이와 높이, 친구들 팔다리 길이 재보면서
깔깔깔 웃는 즐거운 활동이 있었고 그러다 한참을 웃었고 그 시간도 의미가 있었는데
아이들이 자를 대하는 모습, 선긋기를 할 때 쏟아진 질문이 내게는 퍽 인상적이었다. 


아이들이 새로운 개념을 배우고 익힐 때 
무슨 활동을 통해서 만나게 할지 신중한 도입이랄까 활동이랄까..
이런 고민 거의 없이 내 몸에 밴 대로 할 때가 많다. 
더군다나 난 세심한 교육활동에 대한 감이 좀 떨어지는 편에 속하는 사람이다.
얼마전에도 손가락으로 9단을 계산하는 법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몇몇 선생님들이 "과연 저학년 아이들이 따라할 수 있을까요?" 그랬다.
이렇게 간단한 것은 아이들에게 식은 죽 먹기라고 여겼는데 
역시나! 아이들 손가락은 내 예상대로도 아이들 마음대로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이들이 색감이나 질감, 재료, 도구를 어떻게 만나게 할지 깊게 고민하는 교육방법을 만나면
저렇게까지 안 해도 사람들은 잘 살아왔다, 우리는 잘 배워왔다, 세상에는 다양한 교육방법이 있다... 는 식의 태도를 종종 보였다.
인성교육이라든지 자립활동이라든지를 앞세우면서 과목에 대한 연구나 방법론은 좀 뒷전이었다.
교사가 과목의 방법론에 갇히면 전체를 볼 줄 모른다고 경계했는데, 내가 그런 방법론에 갇힐 정도로 열심이었던 적이 있었을까.
그리고 사람이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너무나 몰라서 그런 말을 했구나 생각하니 참 부끄럽다.
내가 대강 해도 아이들이 다 알아서 배우고 익히는, 우리 아이들의 힘을 믿고 좀 게을렀다.
난 어떤 과목을 맡아도 그 시간에 맞는 활동을 적절하게 구성할 수 있다... 는 좀 오만한 생각까지도 했는데..


아, 이제는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정말로 안 되겠다.
세상은 크고 사람은 깊으니 
내가 알아야 할 것들 익혀야 할 것들 참 많도다.
내가 고민하고 부끄러움에 휩싸일 때 누군가는 벌써 실천의 세계로 몸을 옮겼으니 나도 어서 따라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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