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강‘자유와 생명의 공동체’ 수원칠보산자유학교는,우리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돌아보고,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을 고민해야겠다는 생각이 깊어져서 2008년부터 열린강좌 ‘아이와 강’을 꾸준히 열고있습니다. 아이는 자라고, 강은 흐릅니다. 아이와 강은 우리에게는 큰 화두와 같습니다. 아이와 강은 그 존재 자체로서 생명을 상징합니다. 아이는 언제나 순수하고, 강은 늘 생명을 품어 줍니다.  아이와 강은 한결같지만 또 얽매임 없는 자유입니다. 우리 모두 아이에서 출발하여 자라고, 흐르고 또 만나고 이어집니다. 우리는 생명과 자유, 자라고 만나고 이어지는 아이와 강에게 배웁니다

2017년 12월 22일 - 문학으로 만나는 학교철학 / 가야 선생님을 모시고

작성자
(4소윤2재윤맘)
작성일
2017-12-25 23:22
조회
1846
2017년 12월 22일
문학으로 만나는 학교철학 – 가야 선생님을 모시고

먼저 이런 자리를 제안해주신 오드리께 감사드린다. 사람이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나눌 때 굉장히 기쁜데 학교 철학과 문학에 대해 나눌 수 있게 되어 고맙고 기쁘다. 세상 만물이 다 한가지로 해석되는 경험, 사랑에 빠졌을 때는 세상이 사랑하라 말하고 이별하고 난 뒤에는 이별 가사만 내 귀에 들어오듯이. 아이들이 철딱지에 빠져 있을 때에는 길바닥에서 병뚜껑만 보이고 심지어 집에 있는 냄비 뚜껑을 보아도 철딱지 생각이 나듯이. 오늘 제 이야기도 제 방식으로 해석되어 억지스럽게 들릴 수 있다. 이해해주시라.

학교의 철학인 자유, 생명, 그리고 평화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자 한다. 학교설명회 등에서 우리 학교 철학을 설명해야 할 처지에 놓이기도 하고, 평가회 등에서 학교 철학을 내가 어떻게 구현하고 있나 돌아보게 되기도 한다. 내가 어떻게 구현하고 있나 돌아보는데, 내가 살아서는 이룰 수 없는 것이라고 깨달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이 삶에서 무언가를 경험하러 왔으며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된다.”는 말로 스스로를 위로하곤 한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시나 소설을 읽을 때 나도 모르게 이것이 학교 철학과 관련이 있나 없나를 살피게 된다. 이 작품에는 자유, 철학이 어떻게 녹아있는가,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된다. 오늘 준비한 작품들에 시도 있고 소설도 있다. 시를 사원이라고 한다. 한자를 보면 그렇게 되어 있다. (詩)



<아이들에 대하여>

가슴에 아이를 안은 한 여인이
자기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청하자,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의 아이는 너희들의 아이가 아니라
생명 그 자체를 갈망하는 생명의 아들과 딸이다.
그들은 너희를 거쳐 왔으나 너희에게서 온 것은 아니며,
너희와 함께 있으나 너희에게 속하지 않는다.
너희는 그들에게 사랑을 줄 수는 있지만
너희와 똑같은 생각을 줄 수는 없다.
그들 또한 자신의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는 그들의 육신을 집에 둘 수 있지만
그들의 영혼을 가두어둘 수는 없다.
그들은 너희의 꿈속이 아니라
너희는 갈 수 없는 미래의 집에 살기 때문이다.
너희는 그들을 닮으려 애써도 되지만
그들이 너희같이 살기를 바라서는 안 된다.
인생은 거꾸로 가는 것이 아니며
과거에 머물지도 않기 때문이다.
너희가 활이라면 그들은 활을 떠나 나아가는 살아 있는 화살이다.
궁수는 영원의 길 위에 과녁을 정하고,
화살을 멀리 날아가게 하는 자신의 힘으로
너희를 구부리게 하나니,
궁수의 손 안에서 기꺼이 구부리라.
그는 날아가는 화살을 사랑하는 것처럼
남아 있는 활도 사랑하기 때문이다.


-칼릴 지브란 『예언자』에서



칼릴 지브란은 레바논 출신의 시인이고, 우리가 알고 있는 로뎅과도 만난 적이 있다. 로뎅은 이 분의 문제를 알아보고 “세상에서 아주 귀한, 큰 재능을 발휘할 사람이다.” 라고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여러 사람이 번역을 했는데, 함석헌 선생님이나 강은교 시인이 대표적인 분들이다. 이 시는 교육공동체인 이곳에서 우리가 아이들을 어떻게 대해야하는지가 잘 나와 있는 시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우리의 아이가 아니라 생명 그 자체를 갈망하는 생명의 아들과 딸이다. 또 이렇게 생명이 나오면 학교의 철학인 자유와 생명을 생각하게 된다. (일동 웃음) 그리고 너희들, 우리 부모님들, 기존의 어른들을 통해서 나온 존재이지만 우리에게서 온 것은 아닌, 그 자체에 생명력이 있는 그런 아이들. 그리고 또 이 시가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게 우리 어른의 존재가 활이라면 그들은 활을 떠나 나아가는 살아있는 화살, 저희들에게 말하는 것이죠, 그 궁수는 고차원적인 존재일 수도 있고, 신일 수도 있고, 세계정신 그 자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 궁수가 영원의 길 위에 과녁을 정해놓았다고 한다. 이것은 아마 아이들 각자가 타고 난 이 세상에 온 까닭이라고 저는 생각한다. 그리고 궁수가 우리를 구부리게 하나니 우리더러 말한다, 기꺼이 구부리라고. 저희들에게 구부리라고 말한다, 아이들한테 너희 구부려, 이런 게 아니라 아이들이 나가게 하는 바탕인 활 시위인 우리보고 구부리게 하라. 그런데 그는 화살도 사랑하고 활도 사랑한다고 한다. 아이들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을 내보낸, 이 세상에 오게 만든, ‘거쳐 온 존재’인 우리들도 사랑한다. 이 말이 굉장히 위안을 준다. 아이들을 사랑하라는 말을 듣다 보면 때로는 자책을 하게 된다. 특히 부모님들 만나다 보면 내가 어린 시절에 조금 더 내 아이를 보살폈다면 이 아이가 더 바르게 자랄 수 있었을텐데, 특히 생후 3년 안에 맞벌이하느라 아이들 못 키우신 분들은 내가 이 아이에게 충분한 사랑을 줬더라면 결핍들이 덜 했을텐데 하는 자책을 많이 하기 쉬운데, 그 자책감에서 우리들을 좀 자유롭게 하는 시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도 예리하게 나와 있고, 우리들을 사랑하는 그 마음도 나와 있는 칼릴 지브란의 아이들에 대하여.

다음으로 본격적으로 학교 철학인 자유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이 짧은 시가 내 마음을 두드린다고 여겨지는 분이 낭송해주시라.



<허공>

수천수만 번의 벼락도
나를 멍들게 할 수 없다

비어 있으므로

나는 자유


-김선우 『녹턴』에서



학교 철학인 ‘자유’가 무엇인지 굉장히 핵심적으로 보여주는 시라고 느껴졌다. 그래서 이 시를 졸업생 모임에 온 친구들에게 선물로 주었다. 자유로운 존재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떤 언행도 없으면 궁극의 자유를 구현한 존재가 되는데, 그러면 또 부처님이고 예수님이어서 이 세상에 없어야 되고 죽어야 되긴 하지만, 그냥 우리가 지향해야 될 단면을 강렬하게 포착한 시라고 저는 느꼈다. 아이들과 나누고 싶었고. 김선우 시인은 굉장히 맑은 분이다. 얼굴도 맑고, 목소리고 맑고, 사람 자체가 맑은 분이시다. 학교 아이들 가운데 졸업생 한 명을 이 시인을 만난 적이 있는데, 시인께서 감탄을 하셨다. 내 마음대로 해석하여 ‘저 자유로운 존재가 자유의 씨앗을 품고 있는 아이를 알아보셨구나’ 하고. 비슷한 존재끼리 서로를 알아보는 눈이 있지 않은가. 그리고 또 그 아이가 개별적인 존재일 수도 있지만, 또 제 마음대로 ‘우리 초등의 생활을 나름 집대성하고 중등에서 평화의 길을 가고 있는 이 존재를 알아보았구나.’ 라고 해석을 했다. 시인이라는 사람 자체도 학교 철학인 자유를 연상하게 했지만 이 시 자체가 주는 강렬한 힘, 이 시를 보면서 연상하게 되는,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바람에 걸리지 않는 그물과 같이,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 역시도 학교 철학과 굉장히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자유’ 하면 ‘거침없는, 내면에 얽매임이 없는, 이 순간에 현존하는’ 그런 것으로 저는 해석하는데, 수타니파타의 한 구절도 연상하게 한다. 김선우 시인도 불교 공부를 깊게 하셔서 때때로 시에서 불교적인 색채가 많이 묻어난다. 그렇다고 해서 꼭 불교만이 자유를 구현한 대표적인 종교라고 보지는 않지만 때때로 유사점을 많이 발견하곤 한다. 학교 철학 자유를 짧은 시 안에서 만나게 되는 그런 철학이다.

다음 시는 ‘내가 옆 사람에 의해서 굉장히 많이 휘둘린다’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읽어주시라.



<비스듬히>

생명은 그래요.
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나요?
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나무들 좀 보세요.

우리는 기대는 데가 많은데
기대는 게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니
우리 또한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지요.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


-정현종 『견딜 수 없네』에서



우리가 기대는 데에 따라서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다. 학교 철학인 ‘생명’을 소개할 때 모든 존재가 연결되어 있다고 자주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의 반영이라는 그 생명 철학을 어쩌면 시인이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했을까, 정말 학교 철학에 대해서 깊이 공부하신 분이 아닌가 또 이렇게 자꾸 해석하게 된다. (일동 웃음) 게다가 ‘생명’이라고 하면 똑바로 서 있는 존재들이 아니라 흔들리기도 하고 기대기도 하는 그런 존재들의 연결, 그걸 ‘비스듬히’라는 제목으로 아주 잘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비스듬히는 아름다운 기울임인 것 같다. 똑바로 네 길을 가라, 이것보다. 앞서 본 ‘자유’가 ‘독립적인 것’을 상징한다면 ‘생명’은 ‘관계적인 것’,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전달해주는 철학이라고 느낀다. 정현종 시인은 우리들과도 굉장히 친숙하다. 모든 한국인이 다 알고 있는 구절인,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두 줄짜리 시를 쓰신 분이기도 하다. 그리고 구성원들이 알만한 시를 소개하자면, 예전에 봄날선생님께서 교육계획집에 싣기로 했고, 졸업생 혜민이, 우진이 어머님께서 누리집에 올려주신 적도 있는, “방문객.” “사람이 온다는 것은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 그 마음이 함께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이 더듬어볼 수 있는 마음, 내 마음이 그 마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사람을 사랑하고 생명 지닌 모든 것에 애정을 아주 많이 가지고 있다는 하는 것이 이 비스듬히, 섬, 방문객 뿐 아니라 곳곳에서 나타난다. “견딜 수 없네”는 시집 제목이다. 기회가 되면 한 번 보시면 좋다.

자유와 생명을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시를 저는 쉽게 만난 편이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니 그래도 자유가 무엇일까, 생명이 무엇일까, 계속 고민했던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짧고 강렬한 시를 만나게 된 것 같다. 그런데 중등의 철학인 평화는 아직 제 안에 농축되어 있거나 내가 그걸 구현하는 과정을 밟지 못했기 때문에 맞춤한 시가 저에게 아직 오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제 “숲의 노래”라는 이 시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는데, 보자마자 ‘이것 정말 중등 시구나’ 느낌이 들었다. 이 시를 읽고 많이 울었는데, 중등의 슬로건, 목표가 ‘자유로운 나무, 평화로운 숲’이다. 이 시를 중등 선생님들께 전해드린 적이 있다. 이 시는 규빈어머님께서 읽어주시면 좋겠다.



<숲의 노래>

친구와 헤어졌다 멀어져가는 그의 잔기침 소리를 등져
나는 허구들을 두고 숲으로 갔다 11월이다
숲은 어떤 모독도 알지 못한다
누가 애타게 기다리지 않아도
마치 오랜 기다림이 쌓여 있는 듯
몇 달 뒷면 돋아날
새 눈엽들의 수런대는 꿈마저
다 받아들여
여기저기 가슴 두근거리고 있다
빈 숲의 행운 속에 나는 맥박치며 그렇게 살아 있다

나는 하고많은 미련이 좋았다
마을로 간 친구 쪽을
한두번 더 돌아다본 뒤
벌써 어둑어둑한 숲 안으로 들어섰다
아무런 명예도 없이
길은 누구의 길인지 몰랐다

이제 무엇이 두려우랴
오히려
숲은 뜻밖의 가난뱅이 손님 하나 때문에
빈 가지들 어둠속에서 눈떠
어리둥절하게 바람 인다
다른 곳에서는 내낸 불던 바람 잘 때였다

명사보다 형용사가 훨씬 많은 나라에 태어나
나는 하나하나의 이름보다 먼저
하나하나의 슬픔으로 져버린
온갖 나무들의 낙엽에 덮인
말없는 흙에도 닿아 있고 싶었다
발 디딜 때마다
내 발다닥이 작은 꽃들이 핀 듯 찬란하였다

청동기의 때가 흘러갔다
바람의 끝자락이 남아 있고
나중에 올 다른 바람의 예감으로
빈 우듬지들의 수없는 떨림을
이제 나는 볼 수 없다
너무 처절하고자 하였고
너무 황홀하고자 하였다
세상은 가도 가도 오류가 판치더라
그동안 찾아다녔던 정답에의 허욕을
여기 와서 살포시 놓아주었다

빈 숲은 놀랍게도 순정의 전당이어서
늦게 돌아온 새들의 날갯짓 소리가 났다
또한 숲은 가진 것들이라고는 다 주어버려
텅 비어서
누대의 짐승들이 다른 짐승으로 태어난 유적지임을 알려주었다

더 깊숙이 들어갈까 망설였다
밤은 한낮의 거짓들 스스로 물러난 진실의 시간이고 싶으리라

헤어진 친구는 아닐 터이고
여기 먼저 온 사람이
나말고 누구일까
모르겠다
모르겠다
처음 들어보는 노래가 저쪽에서 들려오고 있다
어쩌면 내생(來生)의 내 노래인지 몰라 온몸 일어섰다

가지 마라
더 가지 마라라고
내가 나에게 속삭여 경계하였다

그러다가
허구를 사랑하가 복이 있나니라고
내가 나를 유인하고 말았다
더 가라


-고은 『두고 온 시』에서




이 시가 한 눈에 들어오는 시는 아닐 것이다. 이 시를 처음 봤을 때, 일단 고은이 수원에 거주하는 시인이기도 하고 수원에서는 꾸준히 고은 시 깊이 읽기, 함께 읽기, 다시 읽기, 재해석해서 읽기 등 강좌가 열리고 있다. 수원의 시인이기도 하고, 이 분이 걸어왔던 삶의 길이 구도자적인 삶, 한국사회의 모순을 시든 삶이든 무언가로 극복해보려고 했던 삶의 궤적이 중등을 연상케 해서 고은의 시를 읽었다. 찾아본 것이 아니고 어느 날 우연히 이 시를 읽다가 생각이 났다. 중등 아이들, 중등 교사들, 그리고 그 길을 함께 걷겠다고 한 부모님들이 생각이 많이 났다.
첫 번째 구절에서 “친구와 헤어졌다 / 나는 허구들을 두고 숲으로 갔다.” 허구라는 말이 앞에도 등장하고 시 뒷부분에도 등장하는데, ‘허구’가 기존의 삶의 안락, 안정, 평화로움, 벗어나지 않아도 되고 그냥 걸어도 되는 안정적인 길로 느껴졌다. 나는 그 친구들, 허구를 두고 숲으로 갔는데 하필 11월이어서 아무것도 없는 텅빈 숲이었다. 시적 화자인 ‘나’는 이 숲이 “몇 달 뒤면 돋아날 새 눈엽들의 수런대는 꿈마저 다 받아들인” 숲이라고 본다. 새로운 생명이 움트는 공간으로 보여 가슴 두근거림이 숲의 두근거림이기도 하겠지만 그 화자인 ‘나’의 두근거림이기도 하겠다.
이 사람이 빈숲으로 가서 3연에서처럼 “이제 무엇이 두려우랴 / 숲은 뜻밖의 가난뱅이 손님 하나 때문에 / 빈 가지들 어둠속에서 눈떠 / 어리둥정하게 바람 인다” 텅 빈숲에 아무것도 없는 가낸뱅이가 등장을 한다. 숲에 바람이 불고 소리가 난다. 그 가난뱅이의 발걸음으로 인한 소리일 수도 있고, 앙상한 나무들 사이에 한 존재가 서 있을 때 함께 앙상한 존재로서 나는 소리일 수도 있겠다. 이 “가난뱅이”라는 말을 보자마자 딱 중등에 어울리는 단어라 생각했다. 무엇이 가난하냐면, 생각이 가난한 것이 아니라. 아무 경험이 없지 않은가. 안 가 본 길을 가고 있지 않은가. 어디 나가서 “아이들을 이런 과정으로 키우면 이렇게 자랍니다.” 할 그 무엇도 없다. 경험이 없는 것이다. 이곳에서 이런 통합형 대안학교를 이 마을에서 처음 일궈서 좌충우돌하면서 가는 모습. 가끔 옆에서 보면 좌충우돌하는 것처럼 보인다. 잘 된다 이런 느낌보다, 깎아내리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늘 자기 경험을 통해서 한 발 한 발 나아가기 때문에, 아직은 시간적인 경험이 충분하지 않은 그런 가난뱅이들, 그 가난뱅이들이 어찌되었든 자기의 길을 간다.
“명사보다 형용사가 많은” 것이다. 명사라는 품사의 특징은 무언가를 딱 정돈하고 정리하는 종류의 말이다. 그런데 형용사는 중구난방이며 한 가지를 표현할 때 딱 떨어지고 정확한 것이 아니라 이런 것 같기도 저런 것 같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명사는 이름씨이지만 형용사는 다르지 않은가. 형용사가 훨씬 많은 나라가 지금 중등의 모습인 것 같다. 지금 만들어가고 있는 중등. 이런 곳일지라도 그곳에서 “처절하고자 하였고 황홀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동안 찾아다녔던 정답에의 허욕을 여기 와서 살포시 놓아주었다.” 어떤 분명함을 향해서 가지는 못할지라도, 그게 혹시 우리의 욕심이 아니었을까 하고 뭔가 버리는 공간이라고 할까. 지금 걷는 길이 편한 길이 아닌 것이다. 마지막 연에서 보듯이 자기도 알고 있는 것이다. 비록 저 먼 곳에서 어떤 노래가 들려오고, 그 노래가 내 다음 생에, 조금 더 나아진 미래의 노래일지 몰라 가슴이 떨리지만, 그 길이 너무 힘들기 때문에 “가지 마라, 가지 마라” 하고 내가 스스로 경계하는 것이다. 그럴 때가 있다. 어떤 이상을 향해 가고 싶지만 그 길을 가자고 하니 너무 아득해서 “이제 딱 여기까지 그만!” 하고 싶을 때가 있는데, 마지막 연에서 가슴이 짠했다. “그러다가 / 허구를 사랑하라 복이 있나니라고 / 내가 나를 유인하고 말았다 / 더 가라”고. 결국엔 더 가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의 ‘허구’는 앞에 나온 ‘허구’와 다른 것 같다. 이 뒤의 ‘허구’는 그럼에도 내가 가야할 먼 곳의 길 같은 것. 그래서 이렇게 가는 것이라고 해석을 했다.

앞의 시 자유나 생명은 간결한 시였는데, 중등의 평화에 대해서는 이렇게 구구절절한 시를 고른 이유는 어쩌면 지금 제가 중등을 생각하는 마음이 구구절절해서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명쾌하게 정리된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교육공동체라 함은 초중등에서 딱 끝나는 것이 아니고, 초등 교육을 계속하다 보면 중등 교육에 대한 상이 생기고, 또 그 이후에 졸업 이후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고, 그러다가 또 이 마을이 어떻게 되어야 결국 아이들이 잘 사는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 마음들이 계속 뻗쳐나갈 때, 그나마 초등 교육은 ‘아, 이럴 수 있다’ 하고 정리가 되는데, 중등은 저부터도 몸담아 해본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해야 되는 건가 저렇게 해야 되는 건가’, ‘우리가 정말 지금 이렇게 하는 것이 맞나?’ 하는 되물음도 계속 올라오게 된다. 그런 구구절절한 마음들이 제 마음일 수도 있겠다. 중등 사람들의 마음이 어떤지는 모르면서.. 그래서 <숲의 노래> 이 시가 나에게 왔는지 모르겠다.
‘지금 여기는 초등인데 왜 이렇게 갑자기 난데없이 중등 이야기를 하나’ 하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이 교육 공간에 오래 있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조금씩 넓혀지는 것 같다. 처음 중등을 한다고 할 때도, 학교의 길이기 때문에, 학교가 이 지역에서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힘을 보탤 뿐이지, 내가 그 일을 하겠다거나 무언가 힘을 보탤 사람은 나는 아니다라고 이렇게 선을 긋고 시작했는데, 아이들 커나가는 것을 보면서, 어제처럼 초등 졸업생이 초등을 찾아오는 모습을 보면서 ‘이거 내가 혹시 나라는 존재가 아니라 초등 교사라는 존재의 속성을, 특징을, 역할을 딱 한정짓는 게 아닌가’라고 되묻게 된다, 아이들을 계속 만나다 보면. 그래서 중등처럼 보이는 이야기도 같이 하게 되는데, 중등 이야기라기보다는 초등 교사로서 오랫동안 아이들을 만나다 보면 느껴지는 그런 감정을 나눈 것이라 생각해주시면 고맙다.

학교 철학인 자유, 생명, 평화가 딱 떨어져 무엇이라 정의되지는 않았지만, 늘 내 안에서 길잡이 역할을 하는 상징적인 어휘이고, 그것으로 나는 계속해서 문학 작품에서 만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자유나 생명이나 평화를 무엇으로 정의내리고 있나 봤더니, 자유는 ‘내면에 얽매임이 없는’, ‘두려움이 없는’, ‘현존하는’, ‘지금 이곳에서 깨어있는’ 이런 말로 자유를 정의내리고 있더라. 생명은 ‘우리 모두가 연결되어 있는’, ‘서로의 반영인’, ‘순환하는’, ‘살고 살리는’ 뭐 이런 것을 ‘생생지락, 살고 살리는 즐거움’이라고도 하더라. 평화는 아직은 저에게 덜 체화되었지만 지금 이 수준에서 평화를 정의내리자면, ‘모순을 껴안는’, ‘나를 비우는’, ‘큰 뜻을 기꺼이 따를 수 있는’. 제 삶이 더 풍성해지면 더 농축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부터는 초등 철학, 자유와 생명을 조금 더 자랑하고 싶다. 우리는 너무 흔히 자유와 생명을 말하는데, ‘자유와 생명이 대체 뭐지? 뭐 자랑할 만하지?’ 너무 익숙해서 모를 수도 있을텐데, 왜 자랑할 만한 것인지 어떤 권위를 빌어서 나누고 싶다. 독문학자이자 ‘시인의 집’이라는 책을 쓰신 전영애 선생님을 만나 뵌 적이 있다. 그 분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책 출간 기념회에 갔다가 싸인을 받고 그 책을 보니까 “여주 어디어딘가에 뭘 만들었다” 해서 거기에 가보고 싶어서 찾아갔다. 그런데 선생님이 안 계셔서 짧게 메모만 남겨놓고 왔다. 그런데 거기에 학교 이름을 써놓은 게 아닌 것으로 저는 기억하는데, 그냥 “수원에서 초등 대안학교에서 아이들을 만나고 있다” 이런 정도로 썼는데, 선생님이 학교로 책을 보내주셨다. 그 분의 그 수고, 그냥 방문객을 기억해주시고 본인의 책까지 보내주신 그 수고가 고마워 ‘이 분 대체 누구실까, 만나 뵙고 싶다’ 해서 만나러 갔다. 그런데 첫 인사가 “안 오시면 어쩌나 했어요.” 이더라. 그 말이 굉장히 감동적이어서 ‘정말 귀한 분이다, 이런 분은 나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중학생들도 만나게 해줘야겠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선생님께서 수원칠보산자유학교가 어떤 곳이냐 하고 물으신 적이 있다. 평소에 ‘누가 물으면 빨리 압축해서 핵심만 전달해야겠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그때마다 제가 반드시 언급하는데, 첫 번째로 언급하는 게 “수원칠보산자유학교는 자유와 생명 철학을 바탕으로 하는 초등 대안학교이고, 몇 년전부터 5년제 중고등과정까지 열어서 아이들을 함께 만나고 있다. 내면에 얽매임이 없는 아이로 키우고자 하고,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존재로 키우고 싶다. 우리가 대안학교라고 해서 우리가 정답이 아니라 숱한 대안 중 하나이다.” 거의 이렇게 외워서 설명을 한다. 선생님께도 이렇게 똑같이 설명을 드렸다. 그런데 깜짝 놀라시며 “자유와 생명이냐. 자유라는 말도 그 자체로 참 좋고, 생명란 말도 그 자체로 참 좋은데, 어떻게 자유와 생명을 연결시킬 생각을 했느냐”는 것이었다. 저는 제가 만든 것이 아니니까 ‘그런가보다’ 하며 그냥 넘어갔다. 그런데 그 이후에 대화를 떠올려보니, ‘아, 자유도 참 그 자체로 독립적인 이상, 생명도 독립적인 이상인데, 이 둘이 만나니 서로를 깊게 만들고 서로를 살려주는 개념이구나’ 하고 보게 되더라. 이 시선은 실은 제 내면에서 올라온 것이라기보다는 누가 그렇게 말하니까 그때부터 그렇게 보인 것이다. 자유와 생명 철학이 정말 귀하다고 느꼈다. 이 분이 말만 듣고 그렇게 느낀 것이 아니라 우리 졸업생들을 만나보신 적이 있는데, 만나보신 후, “세상에 꼭 필요한 교육을 하는 교육기관이다. 내가 대학생들도 많이 만나는데 (그 분이 대학 교수이시니) 웬만한 대학생보다 낫다.”라며 혀를 내두르시고 “그 학교가 정말 대단하다. 세상에 필요한 기관이다.” 하고 칭찬을 하셨다. 철학만을 본 게 아니라 자유와 생명을 어쨌든 어렸을 때부터 자기네 삶으로 살고 있는 아이들을 보신 것이었다. 그러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계속 칭찬을 하셔서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아마 우리 학교 아이들 누구를 보더라도 이 분은 그렇게 말씀하셨을 것 같다.
학교 철학이 새롭게 다가오던 어느 날, 무슨 책을 보는데 자유와 생명이라는 단어가 딱 박혀있더라. 그 책이 여기 발췌해놓은 파우스트이다. 민음사에서 펴낸 파우스트의 2권 뒤표지에 이런 말이 나온다. “그렇다! 이 뜻을 위해 나는 모든 걸 바치겠다. / 지혜의 마지막 결론은 이렇다. / 자유도 생명도 날마다 싸워서 얻는 자만이 / 그것을 누릴 자격이 있는 것이다.” 저는 몰랐는데, 파우스트가 좀 지겨웠는데, 갑자기 자유와 생명이 파우스트에 나온다니 책이 새롭게 보이더라. 학교 철학 덕인 것이다.
파우스트는 드높은 이상을 향해서 늘 고군분투하는 인물이다. 심지어 악마와 계약을 하기도 한다. 괴테의 작품이고, 시인데, 독일어로 구사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운율, 민중적인 운율과 문학적인 운율, 이 모두를 구현했다. 총 12,111행으로, 이 원고를 10포인트, 160 간격으로 했을 때 300매 정도 되는 분량이다. 그런데 운율을 딱딱 맞추어서 대서사시를 괴테가 쓴 것이다. 작품을 완성하는 데 60년이 걸렸다고 들었다. 그 ‘파우스트’에 학교 철학인 자유와 생명, 심지어 얼마 전에 다시 읽었더니 평화까지 들어있더라. 그런 줄 몰랐는데.. 왜 그런지 함께 보기 위해서 파우스트의 일부를 가지고 왔다. 제가 이렇게 말하고 조금 부끄러운 게, 앞서 이야기했듯이 냄비뚜껑이 철딱지로 보이는 상태일 수 있어 부끄럽지만..
파우스트는 철학, 법학, 신학까지 공부한 연금술사이다. 이 파우스트라는 존재는 옛날 유럽에서 전설처럼 내려오는 인물이다. 그 인물 이야기가 여러 문학가들의 문학 소재로 활용되었다. 괴테도 거기에 착안을 하여 이 작품을 쓴 것이다.

파우스트가 이렇게 말한다. 지금 가슴이 타버릴 것 같은 분이 읽어주시라.


<파우스트>

우리가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닫고 보니
내 가슴은 거의 타버릴 것만 같다
하기야 박사니 석사니 문필가니 목사니 하는
온갖 멍청이들보다는 현명한 편이지.
나는 회의나 의혹 따위로 괴로워하지 않고,
지옥이나 악마 따위도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그 대신 모든 즐거움은 사라져버리고
무언가 올바른 것을 알았다는 자부심도 없으며
인간을 선도하고 개선시키기 위해
그럴싸한 걸 가르칠 자신도 없구나

-파우스트



초반부에 파우스트가 이렇게 이야기한다. 온갖 공부를 다 하고 앎의 즐거움도 많이 느끼고 그랬는데 어느 순간 깨달은 것이다. ‘온갖 것을 공부해봐야 소용없구나. 이렇게 세상의 많은 것을 알았지만, 물론 세상이 일컫는 박사, 석사보다 내가 조금 현명하지만, 그래도 더 알고 싶고 더 나가고 싶고 하는 근본적인 열망까지 채워줄 수가 없구나.’ 파우스트가 이런 마음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런데 주님과 악마가 내기를 벌인다. 악마가 먼저 자신만만하게 제안을 한다. “내가 파우스트라는 인간의 영혼을 사로잡을 수 있다.”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자신신만한 악마가 메피스토펠레스인데, 메피스토라고 하기도 한다. 현대에 올리는 극에서는 메피스토를 아주 매력적으로 그리고 있다. 실제로 매력적이기도 하다. 그가 말하길, “내가 그 사람을 유혹할 것이다. 내가 그 영혼을 손아귀에 쥐어 내보일 것이다.”라고 말하니, 주님이


<파우스트>

그가 지상에 살고 있는 동안에는
네가 무슨 유혹을 하든 말리지 않겠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니까.

-주님이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이렇게 말을 한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니까”는 파우스트의 굉장히 유명한 구절이라서 안 읽으셨어도 어디 가서 이런 구절이 파우스트에 나온다 하셔도 좋을 구절이다. (일동 웃음) 주님은 단지 기독교적인,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 고차원적인 정신을 상징하는 존재라고 저는 읽었다. 그랬더니 악마가 의기양양해서 정말 더 나댄다. 주님을 약간 비웃기도 하면서. “나 진짜 이 사람을 사로잡을 수 있다.” 그랬더니 주님이


<파우스트>

그러면 좋다. 네 재량에 맡기겠다.
그의 영혼을 그 근원으로부터 끌어내어,
만일 그것을 붙잡을 수 있다면,
어디 너의 길로 유혹하여 이끌어보려무나.
하지만 언젠가는 부끄러운 얼굴로 나타나 이렇게 고백하게 되리라.
착한 인간은 비록 어두운 충동 속에서도
무엇이 올바른 길인지 잘 알고 있더군요, 라고.

-주님이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이 마지막 두 구절도 사람을 굉장히 위로하는 구절이다. 우리가 어두운 충동에 사로잡혀 길을 헤매고 있더라도 우리는 근본 바탕은 착한 인간인 것이다. 심지어는 주님은 이렇게 당당하게 말한다. “악마 네가 사로잡고 그를 유혹하고 타락시켰을지라도 결국에는 너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착한 인간은 어두운 충동 속에서도 무엇이 올바른 길인지 잘 알고 있다고.” 이렇게 말 할 만큼 인간이란 존재는 그런 것 같다. 세상 살면서 볼 꼴, 안 볼 꼴 다 보면서 저 사람의 진위가 무엇인지 의심하게 될 때가 있다. 특히 이상이 높은 사람들은 아상이 높기도 하여, 이상이 높은 사람들이 모인 이 공간에서는 그런 일이 더 잦은 것 같다. 앞으로 그런 일이 또 있을 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가 어두운 충동 속에서 헤매고 있는 인간이 아니기도 하고, 인간이라는 존재는 정말 선하다”라는 믿음이겠다.

어쨌든 이렇게 내기를 벌여서 메피스토가 삽살개로 변신을 해서 파우스트 집에 들어가는 데 성공을 하게 된다. 거기에서 본 모습을 드러내면서 제안을 한다. 그래서 파우스트 박사가 드디어 악마와 내기를 하게 된다. 이렇게 말한다.


<파우스트>

나, 한가로이 침상에나 누워 뒹군다면
당장 파멸해도 좋으리라!
자네의 감언이설에 속아
자기도취에 빠지거나
관능의 쾌락에 농락당한다면,
그것은 내게 최후의 날이 될 것이다!
자, 내기를 하자!

이건 엄숙한 약속이다!
내가 순간을 향해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라고 말한다면,
그땐 자네가 날 결박해도 좋아.
나는 기꺼이 파멸의 길을 걷겠다!

내가 어느 순간에 집착하는 즉시 종이 되는 거야.
그게 자네의 종이든 누구의 종이든 상관하지 않겠네.

-파우스트가 악마에게



스스로 굉장히 비장하게 말한다. 그 가운데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라고 하는 구절도 많이 들어보셨을 것이다. 극에서는 “멈추어라, 순간이여! 너 정말 아름답구나!” 라고 말하면, 그 순간 악마에게 사로잡히는 것이다. 순간 멈추어서 “아름답구나!” 하고 말하는 게 왜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것일까 하고 되짚어보니, 순간에 대한 집착을 말하는 것 같다. 순간이 영원불멸하기를 바라고 그것을 딱 고정된 박제된 무엇으로 만들고자 하는 그 인간의 욕망이 결국 파멸의 지름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 만물이 다 변하고 고정된 것은 하나도 없다는, 저보다 불법을 더 잘 설명해주실 분이 여기 앞에 앉아 계신데 (일동 웃음) 제가 이렇게 말하니 너무 부끄럽지만, 파우스트 역시 어떤 순간에 현존하고 깨어있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에만 머물려고 하는 즉시 영혼을 파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렇게 계약을 하고 온갖 일들이 펼쳐진다. 파우스트가 걸어가는 길 중에서, 우선 마녀의 약을 먹고 굉장히 젊어진다. 젊음이라는 것이 사실 우리 모두가 얻고 싶은 것이 아니겠는가. 젊어서 그레이트헨, 마가레트라고도 하는데, 그 아가씨와 사랑에 빠진다. 실은 굉장히 순수했던 처녀를 농락해서 손아귀에 넣고 사람을 사주해서 결국 엄마를 죽게 만들고 파우스트 자신은 오빠와 대결하여 그레이트헨의 오빠를 살해하게 된다. 이 모든 것이 메피스토의 농간에 의한 것이었다. 이렇게 해놓고서 그레이트헨은 감옥에 가고 파우스트는 또 마법에 취해 다른 곳으로 가고 있다. 이런 것이 삶의 과정과 참 비슷하게 여겨졌다. 우리가 누구를 농락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인생의 길을 걷다 보면, 나의 그 무언가에 취해서 그것을 충분히 즐기다가 어느 순간 그것을 외면하고 다른 길로 접어들기도 하고 과거의 것은 까맣게 잊고, 그런 인간의 성장과정에서 보이는 중대한 사건들을 파우스트가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앞서 자유를 상징했던 김선우의 “허공”이나 생명을 상징했던 정현종의 “비스듬히”와는 또 다른 결의 작품인 것이다. 완성된 존재인 인간이 아니라 계속 방황하고 여기저기 헤매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드러낸 작품이어서 파우스트를 보면서 위안을 얻는다.

온갖 일을 다 겪다가 결국에는 이렇게 말을 한다.


<파우스트>

그렇다! 이 뜻을 위해 나는 모든 걸 바치겠다.
지혜의 마지막 결론은 이렇다.
자유도 생명도 날마다 싸워서 얻는 자만이
그것을 누릴 자격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위험에 둘러싸이더라도 여기에선
남녀노소가 모두 값진 나날을 보내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군중을 지켜보며,
자유로운 땅에서 자유로운 백성과 살고 싶다.
그러면 순간을 향해 이렇게 말해도 좋으리라.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내가 세상에 남겨놓은 흔적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같이 드높은 행복을 예감하면서
지금 최고의 순간을 맛보고 있노라.


-파우스트가



이 장면은 거의 마지막에 도달하는 장면인데, 파우스트가 어찌어찌 하여서 어느 나라로 간다. 그 나라는 재정 파탄에 이른 나라이다. 파우스트가 방법을 제안한다. 돈을 찍어내면 된다고. 이게 참 근대사회의 경제적인 해결책과 유사한 걸 담고 있어서 깜짝 놀랍다. 파우스트에는 인조인간도 등장한다. 왕이 심지어는 그리스의 미녀 헬레네를 데려오라고 말을 했더니 파우스트가 데려오겠다며 호언장담을 하고, 데리러 가다가 그 미녀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고 아들을 얻는다. 그 아들은 태양을 향해 날아가다가 파멸을 맞는다. 이카루스와도 닮아있다.
위의 장면은 어떤 장면이냐 하면, 파우스트가 간척지를 얻어 간척지를 일구는데, 정말 많은 땅을 갖고 있는데도 노부부가 살고 있는 땅을 얻고 싶어 하는데 내주지를 않으니 불을 지른다. 그래서 노부부를 죽게 만든다. 이렇듯 자기의 욕망 때문에 파멸의 길에 이르게 된다. 또 근심에도 눈이 멀게 된다. 파우스트의 무덤을 파는 소리를 간척지를 개척하는 소리로 듣고선 이렇게 말을 한다. “그러면 순간을 향해 이렇게 말해도 좋으리라. /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이 부분의 해석은 사실 분분하다. 민음사의 책 뒤표지에 보면 “악마와의 계약에서 이긴 파우스트의 대사 가운데”라고 나와 있다. 이 말을 했음에도. 실은 “멈추어라, 순간이여, 너 정말 아름답구나!”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자세히 보면 “그러면 이렇게 말해도 좋으리라,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이것 때문에 악마에게 영혼을 사로잡히지 않은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어떤 해석이 중요하다기보다는, 파우스트의 여정에서 어떤 뜻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것의 결론이 “자유도 생명도 날마다 싸워서 얻는 자만이 그걸 누릴 자격이 있다”라는 대목에서처럼, 학교 철학인 자유와 생명이라는 것도 일상에서 재해석하고 이런 저런 적용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방편을 모색하지 않는다면 실은 내가 그 지혜를 얻을 수 없는 것 같다. 남들이 학교 철학인 자유는 이런 것이니 이러이러하게 사세요, 생명은 이런 것이니 이러이러하게 하세요, 하는 순간, 그것은 내 것이 아닌,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것 같다. 싸워서 얻는 자만이 그걸 누릴 자격이 있는 것 같다. 우리가 미완성의 존재일지라도.

파우스트는 지상에 늘 무언가를 남기려고 하는 존재, 드높은 곳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결국에는 내가 세상에 남겨놓은 흔적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런 행복을 예감하면서 최고의 순간을 맞보고 있지만 결국에는 죽게 된다. 우리가 학교에서 무언가를 이룩하려는 과정도 이와 같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할 때는 영원불멸의 무언가를 이루어보리라 하는 마음으로 해나가는 것 같다. 불멸의 무엇을 만들려고 애를 쓰는 것 같다. 하지만 아주 깊은 곳에서는 실은 알고는 있다. 이것이 세상에 존재하는 숱한 양식 중 하나일 뿐이지 여기가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끝으로 파우스트의 영혼을 악마가 데리고 가는데, 천사가 나타나서 파우스트의 영혼을 구원한다. 그 구원하는 힘이 파우스트가 사랑했던 여자인 그레이트헨 덕분이다.


<파우스트>

일체의 무상한 것은
한낱 비유일 뿐,
미칠 수 없는 것,
여기에서 실현되고,
형언할 수 없는 것,
여기에서 이루어진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끌어올리도다.


-파우스트가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끌어올리도다”가 파우스트의 결론이다. 여성으로서 힘을 얻기도 하는데, 여성으로 상징되는 숭고한 사랑이 우리를 이끌어올리는 것이다. 그래서 저는 중등의 평화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얼마 전에 중등 선생님 한 분과 학교 철학 평화를 무엇으로 우리가 달리 말할 수 있을까 이야기한 적이 있다. 서로 교감이 없었는데, 사랑이라고 표현했다. 사랑이란 말을 선뜻 꺼내기가 어려운 것이, 종교적인 색깔이 강한 말이 아닐까 우려해서 쉽게 말을 꺼낼 수 없었지만, 우리가 평화를 구현해나가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모습이 사랑이 아닐까, 앞서 말했듯이 모든 존재와 모순을 껴안는 것이 평화라고 했는데, 껴안을 수 있는 근본 바탕에는 사랑이 있어야 하지 않은가. 그래서 파우스트가 자유와 생명 지혜의 결론, 날마다 싸워서 얻는 자만이 자유와 생명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결국에는 영원히 한 존재를 향해 지고한 사랑을 바쳤을 때 한 존재를 끌어올릴 수 있다, 로 끝나는 자유와 생명 그리고 평화의 대서사시구나 하면서 읽으면서 매우 흡족했다.

초등이든 중등이든 교사를 모실 때 꼭 쓰는 책은 아니지만 한때 꼭 썼던 책인 “비노바바베”를 잠깐 보겠다. 비노나바베를 간디 철학의 후계자, 계승자라고 칭하기도 하고, 그 자체가 독보적이라는 말도 있다. 비노바바베는 사랑과 사상을 중요하게 여겼다. 왜 사랑과 사상을 중요하게 여겼을까 생각해보니, 사랑만 가지고서는 형태가 불분명해서인 것 같다. 사랑은 모든 것을 마냥 껴안아버리는 속성이 있는 것 같다. 때로는 줏대 없이 아무것이나 다 끌어안는 것도 사랑이라고 잘못 정의될 수도 있겠다. 그럴 때 사상, 사상은 정교하고 끊임없이 나를 점검하게 되는 중요한 기준인 것 같다. 그래서 비노바바베가 사랑과 사상이 중요하다고 했던 말이 새롭게 이해가 되고 이 책을 왜 우리학교의 교사를 모실 때 중요한 책으로 썼구나 하고 이해가 된 적이 있다. 파우스트를 보다가, 파우스트와는 전혀 다른 결의 인간인데 비노바바베가 많이 떠올랐다. 파우스트는 굉장히 인간적인 모습으로,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인생의 길이 험난했다 하면, 비노바바베는 조금 더 숭고한 모습으로, 더 높은 지향을 향해서 갔던 모습, 우리가 바라볼 수 있는 존재이다. 그에 비해 파우스트는 동일시해도 좋을, 그래서 우리의 모순을 껴안을 수도 있는 존재가 아닐까 생각을 하게 되었다. 굉장한 위안을 얻게 된 작품이다. 파우스트의 구절 가운데 제가 위로받게 되는 구절이 있다. 마지막에 정리한 구절이다. 파우스트가 악마에게 이야기한다.


<파우스트>

이러한 도취경에 내 몸을 맡기는 것일세.
고통스러운 향락, 사랑에 눈먼 증오, 속이 후련해지는 분노에.
지식에의 갈망에서 벗어나 나의 마음은
앞으로 어떤 고통도 감수하면서
인류 전체에게 주어진 것을
내 내면의 자아로 음미해 보려네.
내 정신으로 가장 높고 가장 깊은 것을 파악하고,
그 기쁨과 슬픔을 내 가슴에 쌓아올리면서
나 자신의 자아를 온 인류의 자아로까지 확대시키려네.
마침내 인류와 더불어 나 역시 파멸에 이르기까지.

-파우스트가 악마에게



파우스트는 파멸, 파국을 예감하면서도 살면서 맞닥뜨리는, 내 삶에 주어진 그냥 향락도 아니고 고통스러운 향락, 마냥의 증오가 아니라 사랑에 눈먼 중오, 그리고 시시때때로 속이 후련해지는 분노에 나를 맡겨보려고 하는 것이다. 결국에는 우리 아이들이 또는 내가 걷게 될 삶의 단면들과 유사한 것 같다. 자유 생명 평화의 철학을 가진 학교에 다녔으니 너는 살면서 자유롭고 생명이 가득하고 평화로운 존재로 거듭나야 하지 않겠느냐고 은연중에 아이들에게 바라게 되는데, 실은 아이들이나 내가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은 이런 것이 아닐까. 때로는 고통스러운 향락에 취해있게 되고, 사랑에 눈먼 증오에 빠져있게 되고, 가끔 속이 후련해지는 분노에 휩싸여 순간순간을 살게 되는. 시는 그런 고군분투의 길이 개인이 하고자 하는 것을 내 내면의 자아로 음미해보려는, 내가 그 길을 걸어보고자 하는, 그런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파우스트를 중등 아이들에게 억지로 읽히는 오류를 범하기도 했다. 전영애 선생님께 아이들을 데려다놓고, 이 아이들이 세상에 어린 나이에 파우스트를 읽는 아이들이라고, 아이들은 말은 못하고, 아닌데, 선생님이 읽으라고 해가지고 조금 억지로 읽었는데, 이런 모습인데 말은 못하고, 여러 대학생들과 함께 섞여 낭송도 하고 그런 시간들을 보냈다. 아이들에게 조금은 전해주고 싶었다. 네가 읽는 구절들을 통해서 “학교 철학에 얽매여 이렇게 살아야 해, 그렇게 살지 않으면 올바른 인간이 아니야” 그런 것이 아니라, 너는 “파국에 이르는 파우스트적인 면모를 보일지라도 어두운 충동 속에서도 올바른 길을 알고 있는 선한 인간이다, 그리고 네가 방황한다면 너의 방황은 네가 끊임없이 노력하기 때문이다” 하는 메시지를 전달해주고 싶었고, 실은 저 스스로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었던 것 같다. 아이들에게 하는 이야기가 실은 제게 하는 이야기더라. 내가 조금 정도에서 벗어난 길을 걷고 있거나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게 아니라 실은 자유와 생명, 평화를 삶으로 구현하는 과정 속에 있는 인간이라는 것. 아이들이라는 존재를 통해서 같이 위로받고 싶었던 것이 나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혼자보다 여럿이 파국에 이를 때 좀 더 괜찮겠지 하는 인간의 집단심리에 기대어.

이외에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자유와 생명, 평화 하면 또 중요한 작품이 니코스 카잔차스키의 “그리스인 조르바”이다. 이 작품은 자유와 생명 철학을 문학적으로 기술해놓은 명작이다. 그런데 그것 못지않게, 아이들이 스무 살 넘어가면 같이 읽고 싶은 책이 “영혼의 자서전”이라는 책이다. 제목도 멋있다. 그냥 자서전도 아니고 “영혼의 자서전.” 한 인간이 걸어야 할 영혼의 순례 과정을 아주 잘 적어놓았다. 인간 안에 있는 가장 오래된 벗이 희망과 두려움이라고 한다. 희망과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하고 있는지를 써놓은 책인데, 그 책을 나중에 아이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

문학으로 만나는 학교 철학, 이 주제가 두서없고 부모님들께서는 ‘혼자 취해서 뭐하시는 거지?’ 하셨을지라도, 이 자리 통해서 나눌 수 있어서 감사한 마음이다. 이 자리를 만드느라 애써주신 오드리에게 다시 한 번 고마움을 전한다.